가야산 원효봉이 불끈 솟아 삽교평야를 토해 내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솟은 테미산 수성봉 아래,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천장절 행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순국한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있다.덕산 시량리 윤봉길 의사의 구국 의지와 민족혼이 서린 이 곳은 사적 제229호며, 유물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돼 있다. 윤봉길 의사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현충시설이다.기념관은 윤 의사 영정을 모신 사당 충의사와 도중도(島中島)내 광현당, 부흥원, 저한당을 비롯 유품 28종, 56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교육, 체험시설로 구성돼 있다. 기념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석문봉 아래 지금의 덕산 상가리 가야동이라 불리는 골짜기의 절터다. 이 터에 남연군묘를 면례해 유명세를 타고 있다.가야사 창건은 5세기로 전해지며, 늦어도 9세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다.예산군은 그동안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사지 추정 불전지를 발굴했으며, 추정 불전지는 8동이 확인됐다. 장방형의 평면구조로 내부 불단시설에서는 소형 청동불두 1점과 소조나발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남연군묘 전면에 ‘ㅁ’자 형태의 건물 배치를 확인할 수 있고, 2018년 12월 부
소설(小雪)이 지난 주말 오후,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좌측 견성암으로 오르는 길은 처처에 붉은 단풍으로 막바지 가을이 익어 터지고 있었다. 계곡의 맑은 물소리는 본래의 진면목을 살피라는 견성암의 이름처럼 청량하다.견성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부속 암자로 1908년 경허선사의 법통을 이은 만공스님이 창건해 지금에 이른다. 3대 방장 원담스님의 제일선원(第一禪院) 견성암(見性菴)이라는 표석의 자획이 예사롭지 않다. 전국 비구니 스님들의 참선도량 종가 역할을 한다고 알려 졌으며, 신여성으로 대변되는 김일엽스님이
삽교 도청대로 수암산 중턱에 위치한 법륜사는 굴바위 절이라고도 알려져 있다.창건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경내에서 고려시대 석물로 추정되는 부처님의 족상과 불두가 있어 학자들은 고려 말기에 가람이 존재했으리라 추정한다. 거대한 바위를 뚫어 조성한 석굴 법당 옆에 연대는 미상이나 조선 중기로 추정되는 관음보살상과 사천왕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현재 전통사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백의관음의 자애로움과 두 눈을 부릅 뜬 사천왕상은 불교 조각의 백미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법륜사는 1945년 법인스님이 사찰명을 통령사라 이름 짓고
조익 선생 묘와 묘비, 신도비, 사우가 격조있게 공간을 채운 신양의 백석골. 겨울을 채근하는 빗줄기에 낙엽은 선홍으로 더욱 붉다. 홍엽을 태워 술을 데운다는 옛 한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홍살문을 지나 묘역을 마주함에 수만권의 경서가 가슴에 차는 듯하다.인조반정과 호란을 겪은 성리학의 대가이자 정치가. 선생의 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포저(浦渚),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선조 35년 문과에 급제해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광해군 때 폐모론으로 예산과 이웃한 신창현에 칩거해 학문에 몰두하며 예산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선생의 묘는
수당고택(修堂古宅)은 목은 이색의 10대 손인 북인의 영수 아계 이산해의 손자 이구의 부인이 인조 15년(1637) 그의 조부 묘소 근처인 대술 상항방산로에 건립한 뒤 헌종 12년에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구한말 형조참의 안동관찰사를 역임한 애국지사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의 생가로 본관은 한산이다.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의 그릇됨을 상소했고, 1906년 병오의병 때 홍주의병장 민종식을 숨긴 일로 공주에서 옥고를 치른 뒤 온양 평촌에서 순국했다. ‘一’자형 남향집으로 ‘ㅁ’자형 안채와 정면 6칸, 측면 2칸, 툇마루 등이 있는 별채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국보 제49호 대웅전이 자리한 수덕사를 찾았다. 평일임에도 탐방객들로 가득하다. 차령산맥의 낙맥으로 우뚝 솟은 덕숭산은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하고 객들을 맞이한다.이곳 황하정루 지하 공간에 수덕사와 연관된 보물들이 있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 수덕사와 말사에 있던 유물들을 모아 1998년 개관했다. 최인호의 소설 로 유명해진 공민왕의 거문고와 근대 선불교 중흥조인 경허·만공선사의 자취, 백제시대부터 시작된 이 지역 불교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보물들이 전시돼 있다. 대웅전에 소장됐
만수의 물결이 출렁다리와 어우러진 예당호변 도로로접어들어 광시방향으로 가는 길. 색은 퇴색했으나 산자락 한 켠으로 홍살문과 격조가 있는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 말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絃)의 묘와 그의 재실이다.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의 후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본관이 경주다. 위정척사파의 대표인물로 1855년 승문원부종자로 출사해 사헌부장령 시절 대원군의 세도를 질타한 계유년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침탈 위기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을 위해 온몸을
예산에서 홍성방향 금마, 홍북과 연접한 응봉 지석리에는 고려말 충신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의 묘가 있다.청송당은 본관이 성주(星州), 처음의 이름은 유(兪)이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어릴 때부터 친구로 전해진다. 고려에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나 친구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 땅 노은동, 지금의 홍북읍 노은리에 은거해 살았다. 이성계가 상장군에 임명하는 등 다섯 차례나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니, 이성계는 그의 충절을 기려 청송당이라는 아호를 내렸다.묘는 남향의 구릉
예산 읍내시장에서 형제고개를 넘어 예당호방향으로 가는 길은 그만그만한 산들이 좌우로 도열하듯 서있다.송림사 이정표를 따라 1.2km 부도산 아래 작은 사찰 송림사가 있다. 이곳에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예산 송림사 부도(충남 유형문화재 제180호)가 있다. 대흥 대률리다. 조선 태종실록에 천태종 산하 송림사가 대흥현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남향으로 대웅전과 삼성각, 우측에 종각이 배치돼 있다. 대웅전을 정면으로 좌측 산 귀퉁이에 송림사 부도가 있다. 팔각당형(八角堂形) 양식으로 하대에는 연화문, 중대에는 구름과 용을 새긴 운룡문
고덕 구만리는 후미지에 있는 길지(吉地), 즉 명당터라는 의미다. 전해 오는 일설에는 중국의 정치에 골몰하던 풍수사상가가 안락한 휴식처를 찾아 헤매다 이 곳을 택했다 전해진다.구만리의 포구 구만포는 삽교천 중류에서 조선시대 내포의 수륙교통 요지로 쌀을 포함한 농작물을 서울로 수송하고 새우젓, 소금 등 해산물을 실어오는 배들이 선착된 포구로 번성했던 곳이다. 1979년 삽교천방조제가 축조돼 구만리 일대에 들어 오던 갯물은 끊기고, 간척지로 예산 황금쌀의 주산지가 돼 있다. 새우젓 배가 드나들던 시절은 옛 이야기가 돼 있으나 구만포의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1752~1801)의 생가 터가 있는 신암 여사울은 현 신례원본당의 공소가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천주교신자로 구성돼 있는 곳이다. 內浦(내포)라 함은 홍주, 예산을 비롯, 육지 깊숙이 갯물이 들어오는 10개 고을의 통칭이다.농민 출신으로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초기교회 가성직단의 일원으로 내포지방의 선교에 혼신을 다한다.1791년 신해박해 때 배교의 쓴맛을 보기도 했으며, 이 후 내포를 떠나 홍산지방에서 복음전파에 힘을 쏟는다. 1801
고려 현종 때 거란족을 물리친 강민첨 장군의 묘소를 찾아 나선 길, 차령의 지맥이 겹겹한 골에는 높지는 않으나 그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대술 이티리 묘소 초입에는 후손들이 세운 구주대첩천년기념비가 우뚝하다.장군은 고려 목종 때 문과에 급제, 문인으로 출사해 장군까지 오른 문무겸장의 인물이다. 본관은 晋州(진주), 시호는 殷烈(은열)이다. 구주대첩의 전공으로 지중추부사, 병부상서에 올랐다. 장군의 묘소에 오르는 길, 장군이 사망하자 장군의 애마를 죽이고 본인도 자결해 장군을 따른 마부의 묘와 말의 무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봉분의
태백산맥 오대산 부근에서 분기된 차령산맥의 준령들이 힘차게 뻗어 청양, 공주로 치닫기 전 신양의 달천천과 죽천천이 합수해 二水(이수), 합수지점의 동산을 一山(일산)이라 표현해 정자 이름을 지은 이가 추사선생이다. 편액글씨 역시 졸박한 행서로 선생의 묵적이다.문장과 글씨는 졸박함을 지켜야 한다는 수졸한묵(守拙翰墨)의 의미가 함축됐다.1849년 이 지역 전주 이씨 문중 사람들의 강학 장소로 건립됐다. 현 신양초등학교의 모태이기도 하다. 평지돌출(平地突出)의 봉긋한 동산에 노거송과 함께 한 정자의 모습은 한 폭의 문인화이다. 一山(일산
영조임금의 둘째 딸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화순옹주는 13세에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결혼했으나, 김한신이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14일을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떴다 전해진다.영조는 애비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어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임금이 열녀문을 내렸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 출신으론 유일한 열녀이다.충남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 신암 용궁리에 위치한다.
신암 용궁리 용산 아래 왕의 묘역이 아니면서도 담장이 둘러쳐진 묘가 이채롭다.조선시대 후기 문신 정효공(貞孝公) 김한신(1720~ 1758) 묘로, 조선 영조임금 사위이자 추사 김정희 증조부다.본관은 경주, 자는 유보(幼輔)로 부인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다.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시문과 서예 전각에 능했다고 전해진다.38세에 세상을 뜨자 영조 임금이 친필 비문을 내려 사위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알려져 있다. 충남문화재자료 제 189호로 지정됐다.
신암면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조선 4대 명필로 인수체(仁壽體)의 대가 자암 김구(自庵 金絿, 1488~1534)의 묘소가 있다.이른 아침 찾아나선 길. 합덕에서 신례원방향 국도변에 거대한 자암의 기념석이 문중에 의해 세워져 쉽게 찾을 수 있다.추사의 명성에 가려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나, 그의 명필은 잊혀지지 않고 추사에 견줘도 손색 없이 기억되고 있다.본관이 광산(光山)인 선생은 1507년(중종2년) 진사에 장원급제한 뒤 부제학까지 오른 문관이며 유학자, 서예가였다. 150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과 투옥 개령으로 유배를 당한 뒤
연이은 폭염에 좀 일찍 서둘러 향천사로 향했다. 오전 7시, 며칠 전 내린 소나기에 극락전을 감아 돈 계곡은 물소리 소소하다.덕숭총림 수덕사 3대 방장을 지내고 선필(禪筆)로 일본에까지 필명을 날린 원담(圓潭)스님의 걸림 없는 서체 ‘향천사’ 표석에 매료되며 발길을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옮긴다. 천년 세월을 간직한 사찰답게 전해 오는 전설이 산과 절에 남아 있음이다.향천사는 백제 의자왕 16년(656)에 의각(義覺)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중국 당나라에서 불상을 모셔 와 절터를 찾았으나 한동안 찾지 못한 터에 금까마귀 한 쌍이 향
덕산에서 백제의 미소가 있는 운산방향으로 가다 보면 사과 맛이 일품인 봉산 봉림리마을이 있다.이곳 서원산 기슭에 우뚝 선 거대한 노거수(老巨樹).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채 지금까지 마을의 보호수로 남아 있다.아래에 천년수의 유래를 소개해 본다.고려조 제8대 현종(1009-1031)때 거란의 침공으로 강산이 황폐하고 민심이 흉흉할 즈음, 서원산 기슭에 노모를 봉양하며 아내와 살던 한 선비는 나라의 존망이 노모 봉양보다 우선이라며 거란족 정벌에 참여하면서 느티나무 가지를 심고 떠나게 된다.후에 거란족을 평정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는 지
신암 용궁리 화암사(華巖寺)는 수덕사 말사로 창건연대는 불확실하나 삼국시대 고찰(古刹)로 알려지고 있다.특히 추사 김정희 선생 문중과 관계가 깊은 사찰로도 유명하다.추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돼 국가에 공적이 있는 관리에게 내린 별사전(別賜田)을 하사받은 토지에 포함돼 추사의 일문(一門)에 세습됐다. 추사는 이곳 오석산(烏石山) 화암사에서 불교에 심취했고, 헌종 12년 제주 유배지에서 문중에 화암사의 중건을 지시하기도 한다.화암사에는 추사의 친필인 무량수각(無量壽閣), 시경(詩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