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고덕장. 명색이 장날이라고, 한적했던 시골장터가 무싯날 보다는 살짝 생기가 돈다. 생선 비린내도 풍기고 두툼한 옷가지며 월동준비를 위한 생필품 파는 노점상들도 몇몇 전을 폈다. 장터에서 장옥 쪽으로 몇 걸음 가면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각종 시계와 돋보기, 주머니칼, 선글라스 등 주섬주섬 담아도 한 보따리가 안될 물건을 펼쳐놓고 있다. 그렇게 한평도 안되는 좌판이 가게고, 장꾼들은 그를 ‘시계할아버지’라고 부른다.“꼭 간판을 걸어야 가겐감. 내 얼굴이 간판이구 이
예산읍내 상설시장 안의 점포들이 하나둘씩 철시를 해도 휘둘리지 않고 슬기롭게, 때론 고집스럽게 문을 열고 있는 가게가 있다. 수십년 단골고객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도 그런 곳이다. 상호 옆에 ‘미원’, ‘다시다’를 선전하는 간판이 참 정겹다. 전화번호가 한자릿수(2국)이던 시절에 만들었으니, 정말 오래됐다. 사람들은 이곳을 시장안 ‘건어물집’이라고 부른다.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30여평의 넓은 공간에 각종 건어물과 제수용품, 식재료 등 수많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상품 진열방식도 마트나 편의점들
열흘이 지나면 우리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명절준비를 가장 먼저 하는 곳은 시장이었다. 이 즈음이면 대목장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상인들로 시끌벅적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던, 공동체문화가 살아있던 시절이었다.잠깐 사이에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2017년 9월 19일, 추석을 보름 앞 둔 예산 상설시장은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이웃과 함께 나눌 만큼 충분한 음식준비와 아이들에게 만큼은 입혀 주고싶어 했던 색동저고리, 대처로 나간 자식들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이불홑청 준비….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생활사에서 과학의 발달로 이룩한 이동수단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자전거다. 그리고 자전거에 그치지 않고 사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기계를 발명했으니, 그 물건이 바로 오토바이다.오토바이는 영어 오토바이크(auto bike)의 일본식 말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부르지 않고 모터싸이클, 모터바이크, 오토바이시클이라 한다. 어찌됐든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영향으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지금까지 오토바이다(법적으로는 이륜차). 시골 어른들은 살짝 격조있게 ‘오도바이’라고 부른다.지금으로부터 134년
1960년부터 30여년 동안 농촌지역 읍면소재지에서 성업을 했던 가게 중 대표적인 것이 ‘전파사’다. 농촌에 전기가 공급되며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했고 그와 함께 라디오, 카세트, 흑백텔레비전 등 선진문물을 들여오고 그것을 수리하는 몫을 맡았던 곳이다.그곳에선 음악 소리와 라디오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땐 시골 꼬맹이들이 가게 유리창 안을 구경하느라 까치발을 서가며 머리통 싸움을 해댔다.어디 그뿐인가. 요술상자 같은 라이도와 텔레비전을 뜯어놓고 납땜을 해가며 수리를 하는 가게 사장님의 모습을 보며 장래의 꿈을
기찻길 옆으로 잡화점이 생겼다. 공회당처럼 멋부리지 않고 시멘트 벽돌을 찍어 밋밋하게 지었다. 신작로가 내다보이는 쪽에 유리를 낀 미닫이 나무문을 달아 상점을 차렸다. 로 간판을 걸고 가게 안쪽으로 방 한칸을 막아 신혼살림을 꾸렸다.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차가 잡화점 유리문짝을 흔들고 지나갔다. 주변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조무래기들이 코 묻은 돈을 쥐고 수없이 들고났다. 삽교 신가리 24-70번지 ‘삽교낚시수퍼’의 주인 이건구(71)씨가 43년 전 잡화점을 열었을 당시 풍경이다. 보통 ‘○○상회’라고 하면 특정 품목을 정하지
예산군 예산읍 원도심 한복판, 화려했던 번성기를 뒤로 하고 물러앉은 골목 안에는 ‘어씨네금방’이란 커다란 간판이 녹을 털어내고 있다.1990년에 지은 깔끔한 3층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 한세기의 시간이 통째로 묶여있다. 사방 벽면엔 시대별로 멈춰선 초침과 골격만 남은 저울에 얹혀진 세월의 무게가 읽힌다. 일제강점기에 선을 보인 벽시계, 탁상시계, 손목시계들이 어떤 것은 온전한 모습으로 또 어떤 것은 반쯤 분해된채 태엽을 드러내고 널브러져 있다.그뿐 아니다. 해체됐거나 반쯤 골격만 남은 저울과 금고의 수많
“여기 장터에서 오래된 가게라면 홍성호철물점을 빼놓을 수가 없지요.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으니 60년도 넘었을거야. 거기 사장이 장호승씨라고, 중국 산둥성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피난 온 화교였어요. 덩치가 컸지. 호인이었고 대국인다운 기질이 있었어요. 옛날엔 가게가 지금보다 컸는데…. 종로약국 자리에 솥 창고도 있었고요. 철물점 바로 옆이 중국요리 재료 파는 가게였고, 그 앞에는 아치형 나무다리가 있고, 풀빵집도 죽 늘어서 장사를 했었는데…”달나라이용원 이승순(68) 사장이 밖을 내다보며 예산읍내장터 옛풍경을
철을 달궈 두드려 늘리고 접어서 연장과 기구를 만들어 내는 곳, 대장간이다. 옛날 시골 장터에는 대장간이 한 두곳 쯤 꼭 있었다. 농경사회가 주였던 시절엔 큰 마을어귀에도 화로에 풀무질을 해 불을 피우고 장정들이 달군 쇠를 메질하는 대장간이 자리를 잡았다.쇠로 만든 것이면 무엇이든 그곳을 거쳐야만 모양새를 갖췄다. 특히 농업에 사용되는 호미, 낫, 괭이, 쇠스랑, 도끼를 비롯해 우마차 등 농기구에 소용되는 부속품들, 목수들이 사용하는 각종 연장과 주방기구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대장장이의 숙련된 기술로 만들어 졌다.세월이 흘러 산업화가
소년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떠나야 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져 생활전선으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기술을 배워야 했다. 양복과 이발, 두갈래 길에서 이발을 선택했다. 예산읍내 시장 안쪽에 있는 충남이용기술학원에 들어갔다.1년도 안돼 학원은 문을 닫고, 남신이용원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그래도 줄곧 그곳에서 일하며 이발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쉽게 배워지는 기술이 아니었다. 무서운 선배들 틈에서 ‘맞아가면서’ 배웠고, 1968년 열아홉살 되던 해 이발기술면허(현재 국가기능사자격증)를 땄다. 충남 최연소 면허소지였다.면허를 땄다고 일번
닭고기는 흔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한 두집 건너 몇 마리씩 키우던 닭은 잡아먹기 보다는 비싼 달걀을 내서 돈살 수 있는,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가축이었다. 큰 제삿날이나 아주 귀한 손님이 와 어쩌다 닭을 잡으면 애들은 그저 노란 기름이 뜬 국물 한그릇 얻어 먹으면 족했다.그런 시절이 지나고 언감생심 그 귀한 닭을, 그것도 귀했던 기름에 통째로 튀겨먹는 세상이 도래했다. 1970년대가 저물던 즈음이다. 국내 양계축산이 본격화 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읍면소재지 전통시장 안에서부터 가마솥을 걸어놓고 석유버너로 기름을 끓여 통닭을 튀겨 내놓
1960년대.희뿌연 흙먼지를 뒤집어 쓴 마이크로 버스가 예산차부(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예산버스정류장)로 들어서면 차부 뒤편에 있는 허름한 차량수리소가 바쁘게 돌아갔다. 자갈길 신작로를 누비고 들어온 조립 버스는 손볼데가 한 두곳이 아니었다.1967년 예농(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 축산과(53회)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 윤영복씨는 공무원이나 교직 또는 농업의 길로 가지 않고 차부 뒤편에 있는 차량수리소에 취직해 손에 망치를 잡는다. 그리고 1년 뒤 이 허름한 수리소가 전국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울 충남유일의 자동차정비공업사로 발전한
1907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하려 정미조약을 통해 군대를 장악한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것이다.이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던, 공주가 본향인 한 청년이 군복을 벗고 강원도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은거하며 의술을 배운 그는 1910년(경술국치)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낙향하다, 고향인 공주까지 가지 않고 예산땅에서 짐을 푼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배운 의술을 펼치려 한약방을 연다. 그가 바로 삼산당한약방 설립자 고 정규헌 선생이다.그로부터 10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쌍송백이로 자리를 옮긴 삼산당한약방은
양철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골목길,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그 어디에나 꼭 있어야 했던 곳, 동네 구멍가게다.이제는 대형마트와 편의점들로부터 등 떠밀려 웬만한 골목길을 다 뒤져봐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상회에서 슈퍼로, 나무문을 샷시로 바꿔도 기업의 골목상권 잠식은 막을 수 없었다.예산읍 산성2리(암하리 윗뜸마을) 성당 옆 골목길을 따라가면 거기 반세기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 곳 남지 않은 구멍가게가 있다. 도르레가 달린 황토색 페인트칠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면 당신의 추억 속에 불이 켜진다.라면땅, 자야, 쫀디기&he
대흥 노동3리 예당긍모로 옆 남향으로 딴산을 마주하고 앉은 5채 남짓 작은 마을.예산사람들에게는 먹태 파는 태평상회와 어죽이 유명한 대흥식당이라고 하면 “아! 거기”하는 곳이다.이제 이곳은 예당저수지 물넘이공사로 인해 올해 연말이면 모두 헐릴 예정이다.이 작은 마을은 1964년 예당저수지가 막히고 신속하탄방으로 가는 새 길이 뚫리면서 생겨났다. 버스종점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자연스럽게 상가가 형성됐다.‘딴산옥’이라는, 장어요리를 파는 꽤 규모있는 방석술집도 있어 새까만 자가용을 몰고 오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참 살기 좋아졌다”란 말이 담고 있는 의미 중 하나가 의료복지다. 몸이 아파도 지척에 병의원이 있어 걱정이 없다. 그것도 내과, 외과, 소아과, 치과 등등 아픈 부위별로 전문적인 치료를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 의료보장제도의 혜택으로 가난이 치료를 받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하지만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배가 아파 뒹구는 남편 때문에 또는 불덩이
1970년대 중학생이었다.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은 한껏 들떴고 우리들 수중엔 귀한 카메라가 들려 있었기에 더욱 폼이 났다.대천해수욕장에 도착해 백사장에서 바다를 등 뒤에 두고 많은 사진을 찍었다. 어깨동무를 하거나 짝다리로 허리에 손을 얹기도 하고 그렇게 그 나이에 맞는 겉멋들이 사진기 안에 차곡차곡 담겼다. 필름 한 통을 다 쓰고 돌아오는 기차 안, 괜히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무심결에 카메라 뒷뚜껑을 열어 버린 것. 으악! 종일 담은 해수욕장의 추억이 홀랑 날아가 버렸다. 내 등과 머
눈보라 비껴 나는 전(全)-군(群)-가(街)-도(道)퍼뜩 차창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아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나 둘 세 켤레1980년대 고등교과서에 올랐던, 장순하 시인이 1966년에 발표한 현대시조 이다. 시인은 눈보라 치던 날 전주에서 군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 있고, 순간 버스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외딴 초가집 섬
양은 주전자를 들고 타박타박 한여름 땡볕을 밟아가며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 목이 너무 말라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모금쯤 마셔봤던 그 시금털털한 맛.베이비부머 세대로 태어나 시골에서 살았다면 어린시절을 떠올릴 때 ‘씽긋’ 웃게 만드는 흑백사진 같은 기억일 게다.막걸리. 이것만큼 수많은 사연을 만들어낸 음료가 또 있을까. 특히 농촌에서는 모를
20세에 이 일을 시작했다. 시나브로 48년이 지났다. 이 자리에서 그에게 기술을 가르친 고 이선근 사장이 처음 간판을 건지는 약 80년이 지났단다. 그 때 그간판 그대로 흥농기계사(예산읍 오리동)는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호가 전하는 의미도 깊다. 기계사 앞에 ‘흥농’ 즉 농업이 흥하는 뜻글을 달았으니 1차 산업과 2차 산업의 만남이다. 대장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