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의 네 아들이 모두 미리 시험 문제를 알아내거나 차작(借作)을 하여 과거에 오른 일에 대해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그 네 아들이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재주와 명망이 없는데도 잇따라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혹은 전혀 문장을 짓는 실력이 없는데도 과거에 너무 쉽게 오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이첨의 도당들이 이미 과거를 자신들의 소유물로 삼았다면, 이이첨의 아들들에 대한 일은 많은 말로 논변할 것도 없기 때문에 신은 다시 운운하지 않겠습니다.”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앞서 윤선도가 최북단 유배지 함경도 경원에서 노래한 5수의 연시조 를 보았다. 시조 한 수를 감상해 보자.궂은 비 갰단 말인가 흐리던 구름 걷혔단 말인가/ 앞내의 깊은 소(沼)가 다 맑아졌다는 것이냐/ 진실로 맑기만 맑아지면 갓끈 씻어 오리라이 시조 역시 경원에서 노래한 다. 비 온 뒤 노래라는 뜻이다. 단 한 수의 노래지만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궂은 비’와 ‘흐리던 구름’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간신을 가리킨다. 흐린 구름이 궂은 비로 내려서 이루어진 ‘깊은 소(沼)’가 맑을 리가 없다. ‘
서른 살의 성균관 유생이라면 초보 정객이다. 이런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시베리아 추위에 살을 에는 최북단 경원으로 쫓겨났을까? “성상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지내기 때문에 그가 이토록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가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어질다고 여겨서 맡겨 의심을 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어질다고 여겨서 의심을 하지 않으신다면,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분변을 해 드리겠습니다. [聖明深居九重 不知其專擅之至此乎 抑雖知專擅
우ᄂᆞᆫ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 이어라 이어라 / 어촌(漁村) 두어 집이 ᄂᆡᆺ속의 나락들락 / 지국총(至菊悤)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 / 말가ᄒᆞᆫ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ᄂᆞ다 [춘사(春詞)4]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장만 마라 / 닫 드러라 닫 드러라 / 청약립(靑蒻笠)은 써 잇노라 녹사의(綠蓑衣(녹사의) 가져오냐 / 지국총(至菊悤)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 / 무심(無心) ᄇᆡᆨ구(白鷗))ᄂᆞᆫ 내 좃ᄂᆞᆫ가 제 좃ᄂᆞᆫ가 [하사(夏詞)2]수국(水國)의 히 드니 고기마다 져 읻다 / 닫 드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이 세상을 떠난 지 201년 후인 1842년에 ‘동계정선생유허비(桐溪鄭先生遺墟碑’(도1)가 세워졌다. 곳은 귀양살이를 했던 제주 대정이다. 이 비가 세워질 당시 대정에 유배객으로 있던 사람이 추사였다. 이 ‘동계정선생유허비’를 세운 사람들과 추사와 인연이 있어 잠시 이야기하고 간다. 이 유허비 뒷면에는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 있다.동계정선생유허비“선생의 적려 유허는 대정(大靜)의 동성(東城)에 있다. 지현(知縣) 부종인(夫宗仁) 사또가 그 유지(遺址)에 서재를 짓고 선비들을 거처하게 하였다
계축옥사와 인목대비 폐위 문제로 귀양살이를 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앞서 이야기한 이항복, 신흠, 이원익, 이신의 등은 그 일부다. 1840년 추사 김정희는 유배객으로 남국 제주의 대정(大靜) 땅을 밟았다. 추사보다 226년 앞서, 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그 이듬해에 역시 유배객으로 대정 땅을 밟은 사람이 있다. 경남 거창에서 난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은 선조와 그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들이다. 그는 선조 사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에 의해 서인(庶人
이육사(李陸史, 1904~1944)가 1940년 세상에 내놓은 시 을 감상해 보자.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1551~1627)의 와 시대적 차이로 그 배경은
앞서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 1551~1627)가 귀양지에서 읊은 연시조 를 감상했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네 벗[四友], 즉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를 4음보로 읊었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에 대한 자신의 속내가 어떠했는지가 분명히 헤아려진다. 이 의 내용과 다르지 않게 이신의는 중꺾마를 보여주고 갔다. 이신의의 5대손인 이상규(李相奎)는 이 노래를 가지고 서첩(書帖)으로 만들고 화공(畫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는 1755년에 당시 75세의 대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같은 역사적 공간에 살았더라도, 후인들이 기억해주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르다. 세월이 흐르면 하나 둘 잊히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방식이라면 작품과 저술로 남기는 것이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추사를 지금까지 불러내 수없이 기억해주는 것은 바로 서화 예술 작품과 그의 시와 글이 있기 때문이다. 추사에게 이런 것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잊혔을 것이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제 때 뜻을 함께 한 고종사촌 사이다. 조용하고 부끄럼 많은 성품의 윤동주보다는 송몽규가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리더십으로 일제의 억압에 더 적극적으로 맞
앞에서 신흠(申欽, 1566~1628)은 죄인의 신분이기에 유배지에서의 서신 왕래는 또 다른 파장을 불러 올 수 있는데, 사실대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고 했다. 이런 예가 있다. 고산 윤선도의 손자 윤이후(尹爾厚, 1636~1699)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흑산도로 유배 간 류명현(柳命賢)에게 보낸 편지에는 시를 짓지 말라고 한 부분이 있다. 이는 지은 시가 자칫하면 구설수를 일으키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억울해 하는 시가 정적들에게 들어가면 다시 고초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앞에서 신흠(申欽, 1566~1628)은 귀양지 춘천에서 남의 집에 얹혀 살다 3년이 지나자 자그만 초가집을 마련했다고 했다. 글이 엉킨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 이전의 모습을 하나 더 들여다 보고 가야겠다.세상사가 사람을 급히 몰아쳐/ 생애는 깊은 골짝 들어왔구나/ 숲들은 쌓인 눈에 묻히었고요/ 외로운 촛불 찬 휘장 깜박거리네/ 골육의 소식일랑 막히었고요/ 벗들의 심부름꾼 드물어졌네/ 황하수 맑아질 날 어느 때런고/ 잠긴 생각 갈수록 그대로일세 [世故驅人急 生涯入峽微 亂林埋積雪 孤燭耿寒幃 骨肉音容阻 朋游信使稀 河淸定何日 冥黙轉
광해군 조정에서 권세를 쥐락펴락하던 이이첨 등의 권신은 인목대비의 유폐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신흠(申欽, 1566~1628)이 서울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내심 불안하였다. 이에 상촌은 광해군 9년 되던 1617년(거개가 1616년으로 쓰고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으로 볼 때 1617년이다.) 정월 살을 에는 추위에 춘천 유배지로 떠났다. 신흠의 유배길은 이항복의 북청 유배길보다 1년 빨랐다. 이 해 《조선왕조실록》 1월 6일자를 보면, “신흠(申欽)을 춘천(春川)에, 박동량(朴東亮)을 아산(牙山)에, 한준겸(韓浚謙)을 충원(忠
1613년 계축옥사가 나자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은 태어난 서울에서 멀지 않은 김포로 방축(放逐)되어 4년을 은거했다. 방축은 벼슬을 빼앗고 제 고향으로 내쫓는 형벌이다. 유배보다는 좀 가벼운 벌이다. 이 김포에서 신흠은 조선 전기 한문 4대가답게 적지 않은 한시와 시조를 빌려 자신의 심사를 풀어냈다. 모두 잘라내기 어려운 명편들이고 이들을 잘 이으면 김포 생활의 퍼즐이 맞추어진다. 몇 수 골라 감상해 본다. 오늘은 일 년만의 동짓날인데/ 구사일생 조정을 떠난 몸/ 쌓인 눈에 일 천 뫼 아스라하고/ 외로운 마을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풀었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노래는 상반된 면이 있다. 평소 즐겁거나 기쁠 때 노래 부른다. 이럴 때는 흥에 겹다. 반면 시름과 근심이 있을 때에도 부른다.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근심과 시름을 풀기 위한 것이다. 이 시조를 부른 이는 아무리 노래해도 마음 속에 풀릴 수 없는 시름이 가득 찬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이 사람은 바로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이다. 그의 시조다. 신흠과 이항복 제목이 이항복에서 신흠으로 넘어
조선을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임진왜란, 이 국난을 극복하는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구심적 역할을 했지만, 최후를 유배지에서 마감했다. 이런 이항복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도1)에서는 “전 영의정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이 북청(北靑) 유배지에서 죽었다.”라는 한 문장의 졸기로 단출하게 기록하는데 그쳤다.이항복에 대해서는, 서인 쪽에 있었지만 권력에 눈이 멀어 파쟁(派爭)에 목숨 건 인물이 아니고 시비를 가려 소신 있게 행동한 인물로 역사는 평가한다. 그가 지나가는 귀양길에는 그 고을마다 장
서울에서 유배지 북청까지는 천 리 길. 1618년 1월 8일 한양을 출발해 사흘 후 포천 선산에 들러 하직 인사를 하고는 2월 6일 북청 유배지에 도착했다. 이항복의 유배길은 만만치 않은 거리에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혹독한 한겨울이라 그 행렬이 몹시 고되었다. “일행의 사람과 말이 계속 달려왔기 때문에 고개를 넘어서는 피곤해 쓰러졌다. 길에서 휴식을 취하더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북청판관 조원범이 서울에서 돌아오다가 공에게 들러 뵙고 절을 하였다. 정청(庭請)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대강 들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을 만나겠다고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임금을 피란지까지 호종하고, 다른 벼슬과 병조판서를 갈마들며 맡아 국난을 극복해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런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이 건강도 좋지 않은 고령이었기에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었거나 약빠르게 처신했다면 어땠을까? 이항복 일생에 귀양살이는 없었을 것이고 귀양지에서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창대군 증살 이후 모락모락 군불 피던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자 이항복은 1617년 ‘정사헌의(丁巳獻議)’라는 글을 올려 광해군
이항복이 37세 나던 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의 피란을 말함)을 했다. 전황에 따라 여차하면 명으로의 망명도 염두에 둔 피란이었다. 선조는 자신이 있는 의주 행재소를 원조정(元朝廷)으로, 한양을 소조정(小朝廷)으로 삼는 분조(分朝) 형태로 전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소조정 한양에서의 수습은 전란 중 급히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몫이었다. 피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한
“많은 친구를 사귀어 보고 여러 가지 일을 같이 경영해 보았으나 의리나 우정이나 사교란 것이 어느 것 하나 이욕(利慾)의 앞에서 배신감을 당해 보지 않은 것이 없다. 순수하다는 것을 정신의 결합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김용준의 《근원수필》 중 에 나오는 글이다. 친구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또한 마찬가지다. 감탄고토(甘呑苦吐)와 토사구팽(兎死狗烹), 그리고 면종복배(面從腹背)라는 말이 지금도 종종 쓰이는 것을 보면 그렇다.정충신(鄭忠信, 1576~1636)에 대해 두
“정충신(鄭忠信)과 김시양(金時讓)이 모두 부처(付處)의 명을 받았는데 국법으로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혼란한 때를 당하여 편하고 조용한 곳에 그 몸을 두게 되니 그들로서는 뜻을 이룬 셈이지만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전일의 공로로 오늘날의 죄를 덮을 수야 있겠습니까. 또 정충신이 무죄하다 하여 아주 석방한다면 모르겠으나, 어떻게 죄를 정하여 유배한 후에 짐짓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정충신을 먼 변방으로 보내 군대에 편입시키고 우선 방환하라고 했던 명을 환수하소서.”1633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