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ᄂᆞᆫ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 이어라 이어라 / 어촌(漁村) 두어 집이 ᄂᆡᆺ속의 나락들락 / 지국총(至菊悤)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 / 말가ᄒᆞᆫ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ᄂᆞ다     [춘사(春詞)4]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장만 마라 / 닫 드러라 닫 드러라 / 청약립(靑蒻笠)은 써 잇노라 녹사의(綠蓑衣(녹사의) 가져오냐 / 지국총(至菊悤)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 / 무심(無心) ᄇᆡᆨ구(白鷗))ᄂᆞᆫ 내 좃ᄂᆞᆫ가 제 좃ᄂᆞᆫ가     [하사(夏詞)2]

수국(水國)의 히 드니 고기마다 져 읻다 / 닫 드러라 닫 드러라 / 만경징파(萬頃澄波)의 슬지 용여(容與(용여)쟈 / 지국총(至菊悤)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 / 인간(人間)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     [추사(秋詞)2]

간밤의 눈 갠 후(後)에 경물(景物)이 달랃고야 / 이어라 이어라 / 압히ᄂᆞᆫ 만경유리(萬頃琉璃) 뒤희ᄂᆞᆫ 천첩옥산(天疊玉山) / 지국총(至菊悤)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 / 선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동사(冬詞)4]


낭만 가객 

(도1) 보길도 세연정.
(도1) 보길도 세연정.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중 4수다. 윤선도가 남쪽 섬 보길도(도1)에 은거하면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바다와 섬의 모습을 각 계절마다 10수씩 노래한 연시조다. 자연에서 노니는 흥취를 웅얼웅얼 읊었다. 근심 걱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고전 문학사에서 송강 정철이 가사 문학의 1인자라면, 윤선도는 시조 문학 1인자에 위치한다. 윤선도는 호가 고산(孤山) 외에 해옹(海翁)이다. 이 노래와 호를 보면 윤선도는 낭만 가객(歌客)이다. 

낭만 가객 윤선도는 이 <어부사시사>에 앞서 이런 노래를 읊었다. 

슬프나 즐거오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밧// 긔 여남은 일이야 분별(分別)할 줄 이시랴// 내 일 망녕된 줄 내라 하여 모랄 손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혜여 보소서// 추성(秋城) 진호루(鎭胡樓) 밧긔 울어 예는 저 시내야/ 무음 호리라 주야(晝夜)에 흐르는다/ 님 향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부터 알아마는/ 님군 향한 뜻도 하날이 삼겨시니/ 진실로 님군을 잊으면 긔 불효(不孝)인가 여기노라. 

5수의 연시조 <견회요(遣懷謠)>다. 자신의 억울한 심정과 임금에 대한 충절, 어버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그 내용이다. <어부사시사>와 그 정조(情調)가 사뭇 다르다. <견회요>는 낭만 가객의 노래가 아니다. <어부사시사>가 1651년 64세에 지어 읊은 거라면 <견회요>는 1616년 서른 살 청년일 때 읊은 노래다. 노년과 청년으로 시간적 간극도 제법 크다. 


청년의 유배객

마음을 달래고 푸는 노래라는 뜻의 <견회요>는 윤선도가 유배지에서 지었다. 상당히 이른 30세의 나이에 귀양살이를 한 사람을 찾기는 좀처럼 어렵다. 유배지는 그것도 최북단 함경북도 경원이다. 1616년 12월 23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교하였다. 윤선도(尹善道)를 절도에 안치하라. 유기와 선도는 크게 다르니, 다만 삭탈관직만하고 풀어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

유기는 윤선도의 양아버지다. 젊다 보니 아버지도 거론하고 있다. 1616년은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 오른 지 8년째다. 하지만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고 이후 인목대비 폐위 등의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광해군에게 왕의 자리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이런 혼란스럽고 혼탁한 정국을 청년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가 윤선도였다. 이 광해군 집권 때 당시 정국을 들었다 놨다 한 인물이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었다. 앞서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해 귀양살이를 한 적객들을 들여다 보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 1551~1627),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이 그들이다. 이들은 윤선도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들이다. 이들을 유배지로 내쫓은 인물도 사실상 이이첨이다. 그만큼 당시 이이첨의 위세는 오랫동안 대단했다. 그렇기에 우리 역사에서 권신(權臣)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이이첨이다. 

윤선도는 1612년에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다. 이이첨 등 일당들의 횡포에 모두가 숨죽이고 타협하며 순응할 때 유생 신분의 윤선도는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이이첨 등의 횡포를 강력하게 규탄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가 ‘병진소(丙辰疏)’다. 이 청년 윤선도의 굽힐 줄 모르는 의기(義氣)의 상소는 그에게 오랜 가시밭길 인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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