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임금을 피란지까지 호종하고, 다른 벼슬과 병조판서를 갈마들며 맡아 국난을 극복해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런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이 건강도 좋지 않은 고령이었기에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었거나 약빠르게 처신했다면 어땠을까? 이항복 일생에 귀양살이는 없었을 것이고 귀양지에서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창대군 증살 이후 모락모락 군불 피던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자 이항복은 1617년 ‘정사헌의(丁巳獻議)’라는 글을 올려 광해군의 폐모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죽음을 예견한 유배

이항복의 유배지는 함경도 북청. 이항복이 한양 청파를 출발해 유배를 떠나던 1618년 1월 8일. 얼어붙은 분위기만큼 추위도 매서웠다. 유배길을 떠나는 이항복을 위한 자리에서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조좌랑에 있으면서 이항복과 함께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고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연릉부원군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마중 나와 7언절구 한 수를 지어주며 귀양살이 가는 벗과의 이별을 슬퍼했다. 

(도1) 시조가 실려있는 《백사선생북천일록》의 부분

이 땅에서 해마다 길손을 보내니/ 산단에서 술잔을 들어 강리로 제사를 지낸다네./ 내 걸음이 가장 늦어 어느 곳에 갈 것인가/ 다시는 옛 친구와 이별할 일이 없으리라. [此地年年送客歸 山壇擧酒祭江蘺 吾行最晩當何處 無復故人來別離] 

이에 이항복도 시를 지어 화답했다.

구름 낀 해 쓸쓸해 대낮에도 희미하고/ 북풍은 나그네 옷 찢을 듯 불어대네./ 요동 땅 성곽은 옛날 그대로 있겠지만/ 다만 떠나간 정령위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네. [雲日蕭蕭晝晦微 北風吹裂遠征依 遼東城郭應依舊 只恐令威去不歸]

정령위(丁令威)는 전한 때 요동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 고향을 떠나 영허산에서 신선술(神仙術)을 닦아 죽은 뒤에 학이 되어 천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성문 앞 화표주 위에 앉았다. 이항복은 이 고사를 끌어다 썼다. 자신이 유배 가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결국 이 시는 시참(詩讖, 무심코 지은 자신의 시가 우연히 뒷날의 일과 꼭 맞는 일)이 되었다. 첫구는 간신의 교언영색에 총명을 잃은 임금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이항복은 이틀 후 10일 저녁 선산(先山)이 있는 포천에 도착했다. 다음 날 선산에 가 선조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포천은 자신이 유배지에서 8개월만에 주검으로 돌아와 묻힌 곳이었다. 이항복은 김화, 회양을 거쳐 18일에 철령(鐵嶺)에 도착했다. 철령은 북한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경계에 있는 높이 677m의 고개다. 예로부터 오르막길 40리, 내리막길 40리나 되는 99굽이의 험한 고개로 알려졌고, 이 고개의 북쪽은 관북지방, 동쪽은 관동지방이라 했다. 철각이라야 능히 넘을 수 있는 이 철령을 63세의 노구로 넘으며 그 유명한 시조 한 수(도1)를 남겼다. 


철령을 넘으며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엇더하리.

전체적으로 조정과 왕실의 장래를 걱정하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충정이 흐르고 있는 시조다. 이항복은 자신을 외로운 신하라 하여 임금 곁을 떠나는 서러움에 북받쳐 있다. 이 서러운 마음을 임금이 계신 대궐에 비로 만들어 뿌려 자신의 충절을 보이겠노라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우리 고전 문학사에 대부분의 작품은 창작 시기를 날짜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문학 작품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시조는 지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희귀한 작품이다. 이는 이항복의 귀양살이의 처음과 끝을 지킨 정충신이 꼼꼼하게 기록해 《백사선생북천일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이 시조에 대해 정충신은 《백사선생북천일록》에서 설명도 덤으로 덧붙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노래가 서울 안에 전해 퍼지니 궁궐 안 사람들이 모두 불렀다. 어느 날 광해군이 뒤뜰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주흥이 무르익자 이 곡조를 듣고는 누가 지었는지를 물었다. 궁궐 사람들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임금은 슬픈 기색을 띠고는 우울해하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술자리를 파하고 말았다. 끝내 공을 소환하지는 않았다. 지금 들어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다. 남원 선비 조경남의 야사에 이 사건이 실려있다.” 

정충신은 이 시조의 자초지종을 응당 알고 있었을 텐데, 끝에 “남원 선비 조경남의 야사에 이 사건이 실려있다.”라는 말을 첨가해 마무리했다. 이는 이 시조와 관련한 반응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했던 정충신의 의도가 아닐까.

이 이항복의 시조는 훗날 100여 년이 지나 남국 제주의 추자도로 유배 간 북곡(北谷) 이진유(李眞儒, 1669~1730)에 의해 소환되었다. 이진유의 유배 가사 작품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의 한 대목이다. 

의릉(懿陵)을 첨망(瞻望)하니 송백(松柏)이 창창(蒼蒼다/ 고신원루(孤臣怨淚)를 한수(漢水)에 가득 뿌려/ 임 향한 일편정(一片情)을 참고 차마 떠나가니/ 내 마음 이러할 제 임이신들 잊을 손가. 

제목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에서 가져왔다. 우리 옛 문학 작품들을 보면 이래저래 얼키고 설켜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엄밀히 보면 표절의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영향 관계로 접근해 감상하면 더 흥미롭다. 이진유는 분명 이항복의 시조를 익히 알고 읊었겠지만 결이 다른 면도 있다. 옛 문학 작품을 서로 엮어 음미하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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