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1)과 (도2)를 황정수 선생 이전에 위작이라고 한 주장에 대한 근거를 보자. 강우방 선생은 글씨에 대해 추사 작품으로 공인된 적 없는 작품으로 글씨가 졸렬하기도 하거니와, 자획 구성이 엉성하고 뻣뻣하다고 했다. 그리고 첫머리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각 글자의 글씨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자획 구성이 엉성하고 뻣뻣하다, 획들이 휙휙 지나간다, 획들이 힘없이 휙휙 날린다, 구성미가 엉성하다 등등. 보고 있으면 불쾌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강우방 선생은 , ,
(도1)과 (도2)를 위작이라고 하는 황정수 선생의 근거 여섯 가지를 들여다 보았다. 두 작품 중 친필과 탁본을 함께 이야기한 을 중점적으로 들여다 보았다. 위작을 주장하는 인물 중 황정수 선생의 근거를 먼저 본 것은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보았듯이 여섯 가지 중 위작으로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를 들여다 보자. 황정수 선생은 덧칠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위작 주장 중 넷째로 들었다. 에
이어 황정수 선생의 위작 근거 중 다섯째를 보겠다. 그대로 읽어 본다. “다섯째, 김정희의 글씨로는 이례적으로 종이를 많이 이어 붙여 쓰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희는 결벽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문방사우에 대해 편애가 심했다. 좋은 종이에 좋은 먹과 좋은 붓을 썼으며, 편지나 초고를 쓸 때가 아니면 늘 잘 갖추어진 좋은 종이를 사용했다. 종이를 이어 붙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 작품이 비교적 크기가 크다 하나, 세로 42cm 정도의 조선 특산 장지이다. 당시에 조선 장지는 1m 이상의 크기가 제작되었으니 두 장만 연결하면 되는데, 굳
추사 친필(도1)은 현판이나 탁본을 보고 쓴 글씨로 이를 위작이라고 하는 황정수 선생의 주장과 같은 예는 또 있다. 역시 과 를 위작이라고 한 이동천 선생이다. 《미술품 진위감정의 비밀, 진상(眞相)》이라는 책에서다. 그대로 옮겨 가져온다. “김정희 을 근거로 한 모본 위작이다. 원작을 각한 판각 현판 은 추사체의 예술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반하여, 위작 은 위조자가 김정희의 높은 경지의 창작정신과 용필법 등을 인지하지 못한 채 글자의 외형만을 베끼
친필(도1)과 탁본 글씨(도2)를 비교해 보자. 이 탁본을 보고 누가 임모한 글씨가 지금의 친필이라는 것이 황정수 선생의 주장이다. 이를 위작 근거의 하나로 삼았다. 친필과 탁본의 차이는 뭘까? 어순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눈으로 보기에 친필과 탁본은 똑 닮아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게 아니다. 차이가 없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비백(飛白)이다. 비백은 붓이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흰 부분을 말한다. 외형은 매우 흡사해도 친필과 탁본을 세심히 비교해보면 비백 처리에서 차이가
강우방 선생과 황정수 선생 이전에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친필 (도1)과 (도2)를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 있었다. 2008년에 나온 《미술품 진위감정의 비밀, 진상(眞相)》이라는 책에서다. 이 책의 저자 이동천 선생은 두 글씨에 대해 추사 글씨의 예술 세계를 모른 채 억지로 포악하게 쓴 글씨로 변종 위작이라고 쓰고 있다.이보다 앞서 2005년 이영재·이용수 부자는 《추사진묵》이라는 책에서 두 글씨를 각각 설명하고 있다. 은 “작자 배자는 근사하고 좋으나 획에 춤추
바로 앞서 을 보았다. 이 글씨의 첫 구절 ‘고고증금 산해숭심(攷古證今山海崇深)’은 추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구가 되었다. 2002년에 나온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 제2권의 부제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가 여기서 나왔다. 이 《완당평전》을 다음과 같이 갈무리하고 있다. “그러다 평전을 끝맺는 이 순간에 다다르면서 마침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맴도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말로 나의 《완당평전》을 끝맺는다. “산숭해심(山崇海深)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2018년 4월 《완당평전》을
추사 글씨에 대한 진위는 어느 한 때의 문제만이 아니다. 추사 당시부터 있어 온 일이고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간 추사의 대표적 명작으로 알려져 온 과 이 추사의 진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나는 추사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고증을 한 바 있다. 이 두 작품은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다. 노이즈마케팅이라든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글씨가 과연 추사의 글씨일까 자문(自問)해 보고 이에 자답
추사는 시난고난했다. 추사의 편지나 시를 보면 그렇다. ‘과천 집에서 문득 읊은 시[과우즉사(果寓卽事)]’를 낭송해 본다. “뜨락에 복사꽃 눈물 흘리니/ 어찌하여 가랑비 내리는 속에/ 주인이 병에 잠긴 적이 오래라./ 봄바람에 감히 웃질 못하는구나. [庭畔桃花泣 胡爲細雨中 主人沈病久 不敢笑春風]”. 추사가 병석에 누워 봄을 보내던 어느 날에 쓴 시다. 참 애처롭다. 추사는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병을 달고 산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추사의 편지에 청대에 오겸(吳謙)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종금감(醫宗金鑑)》에 대
바로 앞서 들여다 본 (도1)는 단오의 풍속이다. 추사가 동암(桐庵) 심희순(沈熙淳)에게 보낸 편지에서 ‘애호’가 보인다. 그 앞부분이다. “창포 술이 파랗게 뜨고 석류꽃이 불을 뿜는다는 구절은 지금 보내온 부채의 머리에 씌어 있는 말이라오. 바로 곧 현재의 절물(節物)이기도 하여 갑자기 이 몸이 묵림(墨林)과 시경(詩境) 속에 들어앉은 것 같네. 따라서 살핀 이 지랍(地臘)에 영감의 시체 동정이 위로 천록(天祿)에 응하여 온갖 아름다움이 물밀려오듯 하리니 축하하여 마지않네그려. 아우는 예와 같이 병들고 어리석어 명절
2017년 1월 20일 용봉산 아래 용봉사(龍鳳寺)와 주변을 거닐었다. 내려오다 한 식당 입구에 붙어 있는 글씨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애호(艾虎)’(도1)라는 글씨다. ‘丙申元旦(병신원단)’이라고 관지가 되어있다. 2017년 새해를 맞아 써 붙인 것이다. 주인 아저씨가 쓴 것이라는데 자리를 비웠단다.나는 이 ‘애호(艾虎)’ 글씨를 본 순간 추사 글씨가 퍼뜩 떠올랐다. 다름 아닌 (도2)다. 두 글씨를 비교하면, 붙어 있는 글씨는 추사 글씨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글씨다. ‘애호’를 그대로 풀면 ‘
동서양의 행복에 대한 생각은 사상과 시기에 따라 좀 다르다. 동양에서의 행복은 각 사상에 따라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유교에서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도덕적 본성(本性)을 보존하고 함양하면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인(仁)을 실현하는 것을 행복으로 보았다. 불교에서는 청정한 불성(佛性)을 바탕으로 ‘나’라는 의식을 벗어버리기 위한 수행과 중생의 구제를 위한 실천을 통해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행복으로 보았다. 도가에서는 어떨까? 타고난 그대로의 본성에 따라 인위적인 것이 더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棄)는 아이 때부터 위인들처럼 포부가 출중하였다. 놀이로는 삼과 콩을 심는 것을 좋아하였고, 삼과 콩도 잘 자랐다. 성인이 되자 농사짓는 것과 토지의 특성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곡식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곳에서는 심고 거두었으며 백성들도 모두 그를 본받았다. 요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로 등용하니 천하 사람들이 그 이득을 보는 공을 세웠다. 순임금이 말했다. “기(棄)야,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릴 때 너는 후직을 맡아 백곡의 씨를 뿌려 그들을 구제했다.” 이에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后稷)이라 부르고
연죽서옥(肰竹書屋)>(도1)의 ‘연죽’은 ‘대나무처럼 그러한’의 의미를 갖는다. 동계 정온 유허비와 동계사(桐溪祠)를 세우는 데 참여한 이인관이 정온을 흠모하여 지은 호로 보인다. 물론 추사가 ‘연죽’이란 호를 짓고 글씨도 써준 것일 수도 있겠다. 송죽사(松竹祠)와도 연결되는 호다.추사에게 글씨를 받은 이인관은 동계 정온의 유허비를 건립할 때, 국가의 토목 공사나 서적 간행 따위의 특별한 사업을 감독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임명하는 임시직 벼슬인 감동(監董)을 맡았다. 앞에서 추사의 을 제주 시절 해
추사는 1840년 55세의 나이로 목숨만을 건지고 남국으로 쫓겨 왔다. 제주 대정에서 8년여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이에 앞서 226년 전 1614년 역시 대정으로 유배 온 사람이 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이다. 1613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강화도로 유배된 영창대군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증살(蒸殺)되었다. 이른바 계축옥사다.이때 동계 정온은 비굴하게 엎드려 있지 않았다. 광해군에게 영창을 대군의 예를 지켜 장사지내고 정
(도1) 대련 글씨에는 협서(脇書, 본문 옆에 따로 쓴 글씨)와 인장이 얹혀 있지 않다.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시(詩)·서(書)·화(畵)·각(刻) 사절(四絶)이다. 각 분야에 걸쳐 더 깊이 들여다 봐야 할 인상적인 인물이다. 행서체의 서간 글씨는 눈을 비비게 한다. 글씨에서 이인상의 특장은 뭐니해도 전서 글씨(도2)에 있다.예서 글씨로는 앞에서 본 것처럼 이 대련 글씨가 이인상의 글씨로 기록되어 전한다. 하지만 이
간송미술관에서의 ‘조선중기서예전’은 꼭 30년 전 이맘때쯤 1990년 5월 20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렸다. 이때는 전시 소식을 접하기도 어려웠고 감상의 기회를 갖기 힘들었을 군복무 시절. 이 전시 소식은 후에 《월간서예》 1990년 7월호를 통해 접했다. 《월간서예》 속표지에는 이 전시의 출품작들이 실렸다. 정명공주(貞明公主)의 대자 해서 글씨 을 시작으로 예서 대련 (도1), 그리고 바로 앞서 이야기한 바 있는 원교 이광사, 행서 두 점 등 모두
2018년 12월 22일, 서우(書友) 회원전에 참석해서 시간을 보내고는 근처 천안박물관을 들렀다. ‘시민의 박물관, 10년을 돌아보다’라는 주제로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물 중에는 암행어사의 대명사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유물이 여러 점 전시되고 있었다. 그중 나는 ‘박문수 증시교지(朴文秀 贈諡敎旨)’(도1)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교지치고는 글자 수도 많고 크기도 크다. 특별히 글씨가 다가왔다. 범상치 않은 글씨다. 보는 순간 우리 서예사에서 추사와 더불어 가장 많이
《화가의 마지막 그림》이란 책이 있다. 마지막 그림이라는 창을 통해 화가 19인의 열정적인 삶과 염원의 메시지를 들여다 본 책이다. 예술가에게 생의 마지막 절필(絶筆) 작품은 그 예술성을 떠나 참 각별하다.생을 71세로 마감한 추사의 마지막 작품은 어떤 것일까, 71번째 글에서 생각해본다. 마지막 해 1856년에 남긴 작품으로 예서 대련(도1), 행서 대련, 해서 글씨 등이 있다.
20대 청년 시절 전서(篆書)를 공부할 때 우창숴(吳昌碩, 1844~1927)의 을 시작으로 와 를 임모했다. 이후 왕수기(王壽棋, 1879~1960)의 로도 이어졌다. 서령인사(西泠印社)는 1904년 중국 절강성 항저우에 세워진 금석학을 연구하는 학술단체다. 중국 전각예술 발전의 일번지다. 역사가 제법 깊어진 서령인사 건물과 함께 빼어난 경관은 명소가 된지 오래다. 1904년 창립 당시 왕수기는 주요 멤버 중의 한 사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