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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조사지린 (農師釣師之鄰)<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 사이>
  • 노재준 <서예가, 예산고 교사>  yes@yesm.kr
  • 승인 2020.07.2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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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棄)는 아이 때부터 위인들처럼 포부가 출중하였다. 놀이로는 삼과 콩을 심는 것을 좋아하였고, 삼과 콩도 잘 자랐다. 성인이 되자 농사짓는 것과 토지의 특성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곡식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곳에서는 심고 거두었으며 백성들도 모두 그를 본받았다. 요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로 등용하니 천하 사람들이 그 이득을 보는 공을 세웠다. 순임금이 말했다. “기(棄)야,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릴 때 너는 후직을 맡아 백곡의 씨를 뿌려 그들을 구제했다.” 이에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后稷)이라 부르고 별도로 희씨(姬氏) 성을 하사했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서 ‘농사(農師)’는 중국 주나라 때의 하나의 벼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권농관으로 농사짓는 것을 알려주고 순찰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농사(農師)와 조사(釣師) 

“임금은 말한다. 아! 너희 방백과 유수, 수령, 목민(牧民)하는 관장(官長)들과 농사(農師), 전준(田畯), 일하는 백성들아! 나 한사람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농사는 백성에게 대본(大本)이며 항산(恒産)인 것은 고금의 공통된 뜻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임금이 새해 들어 처음에 풍년을 기원하고 또 반드시 오생(五牲)의 예를 친히 행하고 백성을 위하여 먼저 하는 것은 권장하기 위해서이다. 권장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드시 수고롭게 해서 이루게 하는 것이다. 또 미리 하지 않고는 설 수가 없다. 미리 하고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수고롭고도 그 이익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듣지 못하였다. 대체로 농사는 백성들이 경작해야만 하늘이 이루게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먹는 것을 또 어찌 남의 권장을 기다릴 것인가? 인정은 게으름에 빠지고 백성들의 습속은 고식에 병드는 것이 늘 걱정이요, 낮에는 띠를 베고 밤에는 새끼 꼬아 미리 갈이질을 준비할 뜻을 모른지 오래이다.” 

추사가 살던 시대의 글이다. 1839년(헌종5년) 1월 2일 자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나온다. 당시에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다. ‘농사(農師)’가 있었다. ‘전준(田畯)’도 있었다. 전준 역시 중국 주나라 때 농업을 장려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다. ‘농사(農師)’와 달리 ‘조사(釣師)’가 있다. ‘조사’는 사전적 의미로 ‘낚시를 가지고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중국에서도 같은 의미인 ‘어인(漁人)’으로 풀고 있다. 낚시인들 사이에서는 ‘고기를 낚는 데 도(道)와 예(禮)의 경지가 사(師)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일컫고 있는 모양이다. 

 

(도1) 추사 글씨 <농사조사지린>.

이러한 ‘농사’, ‘조사’와 관련하여 추사가 쓴 글씨가 있다. <농사조사지린(農師釣師之鄰)>이란 예서 글씨(도1)다. ‘농사와 조사의 이웃’이라는 의미다. 과천 시절에 많이 사용한 ‘김정희인(金正喜印)’ 양각 인장이 글씨의 왼쪽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이 글씨의 오른쪽엔 “阮堂隸書六字額”, 왼쪽엔 “此先生所蜀隷之參差無比計白當黑極妙者也”라고 배관 글씨가 얹혀 있다. 현대 전통 서법으로 중국까지 필명을 날리고 떠난 여초 김응현 선생이 1987년에 쓴 배관기다. 오른쪽은 ‘완당의 여섯 자 예서 편액’이란 의미이고, 왼쪽은 ‘이는 선생의 촉예로 가지런하지 않음이 비할 데가 없고 여백을 계산하여 흑을 적당히 한 것으로 극히 묘함이 있다.’라는 뜻이다. 


추사의 서학 과정

이 <농사조사지린>은 추사 글씨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글씨다. ‘지(之)’ 자는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추사유묵도록》에 실려 있는 <칠불설게도득문지(七佛說偈都得聞之)>의 ‘지(之)’ 자와 같은 모습이다. 이 글씨는 작년 중국 나들이 때와 올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그 실물을 드러낸 바 있다. ‘鄰(린)’ 자의 오른쪽 부수 ‘阝(邑)’는 전서로 더 중첩하여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예서체에 전서를 융합한 것은 추사 글씨의 특징이다. 

(도2) ‘사(師)’ 자가 나오는 윤주비(尹宙碑)의 부분을 임모한 추사 글씨.(도3) ‘사(師)’ 자가 나오는 부분의 윤주비. (도4) 노준비에 나오는 ‘사(師)’ 자.

<농사조사지린>에는 ‘사(師)’는 두 자다. 같은 글자임에도 서로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글씨가 예술임을 보여주고 있는 글자다. 첫 번째 ‘사(師)’ 자는 추사가 한나라 때의 윤주비(尹宙碑)를 임모한 글씨(도2)에서 볼 수 있다. 왼쪽 공간에 점을 찍고 있다. 하지만 이는 윤주비(도3)에는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추사도 익히 알고 있었을 금석문인 한나라 때의 노준비(魯峻碑)(도4)에서 볼 수 있다. 이 노준비는 앞서 <학위유종(學爲有宗)>을 들여다 볼 때 언급한 바 있다. 두 번째 ‘사(師)’ 자는 왼쪽을 전서로 처리하고 있다. 전서 중 대전(大篆)인 금문(金文)에서 볼 수 있는 형태다. 

무엇보다 <농사조사지린>에서 추사의 서학 과정이 읽힌다. 추사 글씨는 온갖 금석문을 보듬고 나온 글씨다. 누구보다 수많은 비첩(碑帖)에 대한 임모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추사는 금석문을 그대로 옮겨 베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재해석하고 자기화해 임모했기에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윤주비를 임모하고는 노준비의 글씨 모습을 하고 있는 ‘사(師)’ 자는 이를 보여주는 예다. 추사가 임모한 <곽유도비(郭有道碑)>나 백석신군비의 뜻을 따랐다고 한 <명선(茗禪)>도 원 금석문과는 많이 비껴 가 있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추사 글씨의 진위를 논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 <농사조사지린>은 1995년 부산의 한 화랑에서 전시한 바 있다. 화랑은 이 글씨가 오롯이 실린 도록을 남기고 몇 년 후 운영을 멈춘 듯하다. 도판으로 이 글씨를 보는 순간 놀람으로 다가온 글씨였다. 최준호 선생이 쓴 노작 《추사, 명호처럼 살다》에서는 이 <농사조사지린>을 추사의 아호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농부나 어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풀이하고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호라고 하고 있다. 이 글씨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이 친필은 어디에 있을까? 추사의 이 <농사조사지린> 글씨의 실체를 지면으로 끌어올리니 후텁지근한 여름이지만 속은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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