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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죽서옥 (肰竹書屋) ①<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 사이>
  • 노재준 <서예가, 예산고 교사>  yes@yesm.kr
  • 승인 2020.06.2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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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1840년 55세의 나이로 목숨만을 건지고 남국으로 쫓겨 왔다. 제주 대정에서 8년여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이에 앞서 226년 전 1614년 역시 대정으로 유배 온 사람이 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이다. 1613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강화도로 유배된 영창대군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증살(蒸殺)되었다. 이른바 계축옥사다.

이때 동계 정온은 비굴하게 엎드려 있지 않았다. 광해군에게 영창을 대군의 예를 지켜 장사지내고 정항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돌아온 건 광해군의 대로(大怒)와 함께 원악지 제주로의 유배다. 대정에서 10년간 유배객으로 살았다. 이 때 읊은 것으로 보이는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고된 귀양살이를 강호를 벗 하며 견뎌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노래다.

책 덮고 창을 여니 강호에 배 떠있다. / 왕래 백구는 무슨 뜻 먹었는고. / 앗구려 공명도 말고 너를 좇아 놀리라.


동계정선생유허비

정온이 해배된 지 200여년이 훌쩍 지나 1842년 대정에 ‘동계정선생유허비(桐溪鄭先生遺墟碑’가 세워졌다. 이 유허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 있다.

“선생의 적려 유허는 대정(大靜)의 동성(東城)에 있다. 지현(知縣) 부종인(夫宗仁) 사또가 그 유지(遺址)에 서재를 짓고 선비들을 거처하게 하였다. 부 사또는 본래 이 지방 사람으로, 정치를 행하면서 무엇을 먼저 하고 뒤에 해야 하는지를 알았으니, 가상하다고 할 만하다. 나는 이 지방에 와서는 귤림사(橘林祠)에서 선생을 배알하였고, 내가 읍지(邑誌)를 정리할 때에 선생의 율시 한 수와 발문 한 편을 읍지에 실어 드러내었고, 또 석공에게 명을 내려 그 터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오호라! 선생의 덕의(德義)와 명절(名節)은 천지와 나란하기 때문에 유적이 있는 곳에서는 공경하여 아끼고 보호할 줄 알아야 선비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선생에게 외손이 되지만 선생을 경모하는 것은 공적인 것일 뿐, 어찌 감히 사사로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겠는가! 숭정후사 임인년(1842년)에 성주이씨 이원조가 삼가 쓰다. (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 夫知縣宗仁因其址闢書齋居儒士 夫土人爲政而知所先後可嘉也 余州首謁先生于橘林祠 修邑誌得先生一律詩一跋文表而載之 又命工竪石於其墟 鳴呼先生德義名節與天地竝立齋之謫生能知愛護玆石於爲士也無愧 余於先生外裔也慕先生公耳何敢私 崇禎後四壬寅星州李源祚 謹書)”

우측면에는 “監董 前 同知 李仁觀 別監 金鼎洽”이라고 새겨져 있고, 좌측면에는 “看役 接生 姜瑞瑚 柳宗儉”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유허비 건립에 있어 감동(監董)은 전(前) 동지(同知) 이인관(李仁觀)과 별감(別監) 이정흡(李鼎洽)이, 간역(看役)은 접생(接生) 강서호(姜瑞瑚)와 유종검(柳宗儉)이 맡았다.


연죽 이인관

(도1) 추사 글씨 〈연죽서옥〉.

이 유허비를 세우는 데 감동으로 참여한 이인관(李仁觀)이 주목되는 인물이다. 추사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추사가 이인관의 서재 이름 <연죽서옥(肰竹書屋)>(도1)을 써 준 바 있다. 이 글씨는 지난 2015년 1월 ‘TV쇼 진품명품’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인관은 이 유허비의 감동(監董)을 맡았다. 감동은 조선 시대에 국가의 토목 공사나 서적 간행 따위의 특별한 사업을 감독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임명하는 임시직 벼슬을 이르던 말이다. ‘연죽(肰竹)’은 이인관의 호다. 이인관이 남긴 <탐라수필(耽羅隨筆)>도 <연죽서옥>과 함께 소개되었다. 《탐라수필》은 당시 제주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바로 연죽서옥에서 쓰인 책이다.

이 유허비가 세워지고 1843년에는 정온을 배향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에 ‘동계사(桐溪祠)’가 건립되었다. 이 동계사는 정온의 절개를 소나무와 대나무에 비유하여 ‘송죽사(松竹祠)’라고도 불린다. 이 송죽사 글씨를 추사가 썼다고 전해진다. 송죽사는 후에 송죽서원으로 격상되었다고 한다. 서원 격상이 오히려 불행을 불렀다. 고종 8년 1871년에 내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송죽서원은 훼철(毁撤)되었고 이때 추사 글씨 현판도 유실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추사의 제자다. 제자에 의해 스승의 흔적이 사라진 운명을 맞은 것이다. 대원군은 자신이 거처했던 운현궁에 추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노안당(老安堂)> 편액을 걸을 정도였다. 상반된 추사 글씨의 운명이 얄궂다.

이인관이 지은 한시 한 수가 누리그물에서 건져진다. ‘正方淵瀑布(정방연폭포)’라는 시다. 시재가 뛰어나다. 이를 낭송해 본다.

終焉歸海海于玆(끝내 바다로 돌아가니 바다가 예서 시작되는구나) / 何故奔流迅若斯(어찌하여 분주히 달려 이같이도 빠른가.) / 圍削屛巖奇且絶(둘레에 병풍처럼 깎인 바위가 기이하고 뛰어나구나) / 化翁初意有誰知(조화옹의 처음 뜻을 그 누가 알까)

추사가 이런 이인관에게 써 준 <연죽서옥> 글씨로 제주 귀양살이 때 더 넓어진 추사의 교유가 읽힌다. 그리고 제주 시절 해서와 행서의 중간쯤인 해행체 모습을 새롭게 살펴보기에 좋은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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