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이 해 가을걷이 후 구입한 텔레비전을 통해 얼마 안 있어 어린 눈으로 현대사의 두 개의 큰 사건을 목도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몇 달 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에는 그 당시 TV 화면에는 아흐레 동안 영정 앞에 향 피어 오르는 장면과 가끔 사건의 수사 소식을 보내주는 장면이, 1980년 5월에는 광주사태라 해서 9시 뉴스 첫머리부터 광주에는 폭도들로 날뛰고 있다고 전한 앵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서 남아 있다. 

10여 년 전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는 문근영이 수년 동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익명으로 8억5000만원을 기부한 기부천사로 밝혀져 화제였다. SBS ‘바람의 화원’에서 남장여자 신윤복을 연기하면서 ‘국민 남동생’이라는 호칭도 얻었다. 익명의 기부로 인한 선행과 더불어 가족사가 화제다. 외할아버지는 통혁당 사건으로 30년 넘게 옥고를 치른 유명 통일운동가였다는 사실과 작은외할아버지는 대학 재학 중 5·18 광주항쟁 당시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는 현대사의 슬픈 가족사가 그것이다.


민주화의 성지, 금남로

(도1) 광주광역시의 금남로(왼쪽). (도2) 정충신 초상화(오른쪽).
(도1) 광주광역시의 금남로(왼쪽). (도2) 정충신 초상화(오른쪽).

1980년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이 지금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금남로(錦南路)(도1)다. 광주의 중심가인 도청에서 유동삼거리가 금남로 불린다. 이 금남로는 5·18 민주항쟁 역사의 현장 이전에 민주화의 길로서 그 유래가 깊다. 금남로에서 첫 대규모 집회는 3·1운동인 1919년 3월 10일 집회 때다. 광주 작은 장터에서 발원한 시위대들은 금남로로 진출하여 들어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후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이어 4·19의거로 인해 금남로에서는 7명이 유명을 달리하고 1백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금남로라는 이름 어디서 유래했을까? 

충무로, 을지로, 퇴계로 등의 도로 이름은 누구를 본받아 지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앞의 것에 비해 금남로는 익숙치 않을 성싶다. 금남로는 조선 중기의 무신 정충신(鄭忠信, 1576-1636)(도2) 장군의 군호 ‘금남군(錦南君)’에서 왔다. 해방 후 1947년 8월 15일 이래 금남로라 불리며 정충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니 현대의 도로 이름 중에서는 역사가 제법 깊다. 

 

(도3) 서산시 금남로.
(도3) 서산시 금남로.

금남로는 광주 외에 또 있다. 누리그물 우편번호 검색창에 ‘금남로’라는 이름을 집어 넣으면 두 지역이 더 나온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과 충남 서산시 동문동에도 금남로(도3)가 있다. 둘 다 정충신과 관련된 곳이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에는 정충신 영정각(影幀閣)이 있다. 그러면 우리 지역에서 가까운 서산은 왜 금남로일까? 

조선 16대 왕 인조는 1623년 반정(反正)을 통해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이귀, 김자점, 이괄 등이 명나라의 후원을 받아 광해군을 끌어내려 귀양을 보내고 선조의 아들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니 이 사람이 인조이다.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철저하게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고집하다가 결국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후금(청)의 침략으로 청 태종에게 삼두구고배의 항복을 하게 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을 당한 왕이다.

반정공신 중 한 사람인 이괄은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장수로 큰 공이 있었다. 그런 그가 농공행상에서 자신의 공이 일등이 아닌 이등공신으로 한성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에 제수되자 불만을 품었다. 인조는 이런 이괄을 달래고 북방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려는 뜻에서 장만을 도원수 겸 북방군 총사에,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도 절도사에 임명하여 영변으로 떠나도록 했다. 그러자 이괄은 자신을 변방으로 내치고, 저희들끼리 해먹으려는 수작이라 생각하여 휘하 3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인조 2년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이다. 이괄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한 후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했고, 인조는 충남 공주로 몽진을 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고 임금을 한양으로 환궁케 한 장수가 바로 정충신이다. 


한미한 출신의 충무공

우리 역사에서 충무공(忠武공) 하면 무엇보다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정충신의 시호(諡號)도 충무공이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 정충신을 비롯하여 조영무, 남이, 구인후,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등 아홉 명이다. 

정충신이 충무공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자가 가행(可行), 호가 만운(晚雲)인 정충신은 1576년 광주목(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정충신은 고려 말엽 정지 장군의 7대손이지만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 태어났기에 본인도 이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글을 배운다는 것은 언감생심. 정충신은 지방관아에서 수령의 심부름이나 하는 신분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17세 때 당시 광주 목사였던 권율(權慄, 1537~1599)의 휘하에 들어가 권율의 노복 역할을 했다. 권율에게 좋은 계략을 아뢰고 영민해 권율의 총애를 받았다. 정충신은 당당히 자진해 광주에서 왜군의 적진을 뚫고 의주에 피란 가 있던 선조에게 장계(狀啓, 감사나 왕명으로 파견된 벼슬아치가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를 전하는 등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어명에 따라 천민의 신분에서 평민으로 승격되었다.

이런 정충신은 권율의 사위인 병조판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눈에 띄어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충신’이란 이름도 이항복이 지었다고 전한다. 후에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무관으로 임명되어 양반까지 신분이 올랐다. 정충신은 엄격한 신분제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각고의 노력과 겸손함으로 장군의 자리까지 오른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신분제가 없어진 현대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무용지물의 말이 되어 가고 있으니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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