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1) 신암에 있는 김구의 묘소.
(도1) 신암에 있는 김구의 묘소.

자암이 남해 유배 생활 중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2년의 남해의 긴 귀양살이를 마치고 자암은 임피(臨陂, 전북 옥구)로 이배되었다. 기다리던 해배는 아니지만, 고향에서 좀 더 가까운 곳이었다. 자암은 1533년 자유의 몸이 되어 예산으로 돌아왔다. 유배 중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떠난 부모의 산소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통곡하여 눈물 방울이 떨어진 곳마다 초목이 말라죽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해배 이듬해 자암은 병을 얻어 47세의 나이로 파란의 삶을 마무리했다. 신암 종경리에 묘(도1)가 있다.

《자암김선생문집자암김선생기년(自菴金先生文集自菴金先生紀年)》을 보면 “嘉靖十三年甲午公四十七歲是年還授職帖十一月十六日捐世於禮山西面王子池別莊”라고 쓰여 있다. 자암은 1534년 ‘왕자지(王子池)’의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이 왕자지는 추사고택 앞의 연못을 말한다. 300여 년의 세월을 두고 조선 최고의 서예가인 추사와 자암이 그 많은 땅 중 신암이라는 같은 지역의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다. 기막힌 인연이다. 예산(禮山)은 ‘예산(藝山)’이 아닐 수 없다. 왕자지 연못은 일제 시대에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 아쉽고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 자리를 정확히 발굴 복원하는 것은 추사고택과 그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있어 참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다.


주목받아야 할 시조 작품

자암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고,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서예가라는 면에 가려 그의 시조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가 남긴 시조는 다섯 수에 불과하지만 시조 작품에도 주목해 보아야 하는 인물이다.

산수(山水) 내린 골에 삼색도화(三色桃花) 떠오거늘/ 내 성(性)은 호걸이라 옷 입은 채 들옹이다/ 꽃일랑 건져 안고 물에 들어 속과라

무릉도원의 정취를 쉬운 우리말로 읊은 걸작이다. 순수한 우리말의 멋스러움이 한껏 스며 있다. 골짜기를 따라 떠내려오는 복숭아꽃을 보고 옷도 벗지 않고 그냥 입을 채로 뛰어들어 꽃을 몸으로 건져 안고 물 속에서 물장난치고 있다. 한폭의 그림이요 신선이다.

태산(泰山)이 높다 하여도 하늘 아래 뫼히로다/ 하해(河海) 깊다 하여도 땅위에 물이로다/ 아마도 높고 깊은 것은 성은(聖恩)인가 하노라

하해지택(河海之澤)은 하해와 같이 크고 넓은 은혜를 말한다. 그와 같은 임금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다. 태산과 하해에 성은의 높고 깊음을 비유하고 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봉래 양사언(1517-1584)의 시조다. 지금은 학교 교육과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시조가 되었지만, 앞선 세대의 대부분은 암송하고 있는 시조다. 양사언은 자암보다 뒷사람으로 역시 자암과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이다. 자암의 시조를 본받아 더 많이 회자되는 유명한 시조로 발전 승화시켰다. 정작 깊은 영향을 준 자암의 시조는 널리 알려져있지 않다. 


인수체

(도2) 자암이 권벌에게 써 준 글씨. 충재박물관 소장.(도3) 두보 시를 쓴  자암의 글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4)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2) 자암이 권벌에게 써 준 글씨. 충재박물관 소장.(도3) 두보 시를 쓴 자암의 글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4)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암은 인수체의 서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추사와 달리 많은 작품이 전하지 않아 인수체의 정체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하는 글씨를 보면 자암은 여러 서체 중 초서에 특장이 있다. 인수체는 초서체를 두고 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암의 초서 글씨로 전하는 것은 간찰 외에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에게 써 준 글씨(도2)와 두보의 시를 쓴 글씨(도3)가 있다. 권벌에게 써 준 글씨는 왼쪽 아래 ‘대유서증(大柔書贈)’이라고 썼다. ‘대유가 써서 준다’라는 뜻이다. ‘대유’는 김구의 자(字)다. ‘대유서증(大柔書贈)’은 본문 글씨와 조화를 이룬다. 소중한 자료다. (도3)은 5언절구의 두보 시 글씨의 부분이다. 전모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두보 시 글씨는 진위와 관련하여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는 글씨다. 왼쪽에는 ‘金絿号自菴(김구호자암)’이라고 단아한 해서로 쓰고 왼쪽 옆에 ‘自菴(자암)’이라는 양각주문(陽刻朱文) 인장을 찍었다. 이 부분에서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자암 당시에는 서화에 인장을 찍은 것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인장의 위치도 생뚱맞다. 중국에서 서화에 인장을 찍기 시작한 것이 원과 명나라에 이르러서다. 조선은 이보다 늦다. 이러한 예가 있다. 그 유명한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도4)이다. <고사관수도> 왼쪽에는 ‘仁齋(인재)’라는 음각백문인이 찍혀 있다. 인재는 강희안의 호다. 자암보다 앞선 인물이다. ‘自菴(자암)’과 ‘仁齋(인재)’ 두 인장은 그 당시에 찍은 것이 아니다. 각풍으로 볼 때 근현대에 와서 새겨 얹은 인장이다. 두 작품 모두 보통 솜씨의 작품은 아니지만 자암과 강희안의 작품으로 확정되어질 수는 없다. 
다섯 번에 걸친 자암 김구에 대한 글을 여기서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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