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암의 두 시를 더 읽어 본다. 

허물을 쫓고자 궁벽한 강가에서 문을 걸어 잠그니/ 달만 마주해도 그림자와 몸을 서로 가엾게 여기네./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 서늘하니 사람들 시심을 돋우고/ 닭 잠들고 밤은 차가우니 외로운 새벽이 두렵구나./ 겨울 옷을 손으로 다듬는 어머님 생각에 슬퍼지고/ 짧은 편지에 심회를 담으니 옛 사람에게 부끄럽네./ 슬프게 하늘 북쪽 끝 도성을 바라보니/ 서리가 귀밑털에 더해서 몇 올이나 새롭겠는가?

고향 그리워 날마다 높은 산봉우리에 오르니/ 소식은 아득하고 바다와 산은 겹겹으로 이어졌네./ 음식이 떨어지자 아내는 약을 넣어 보내왔고/ 그릇이 왔는데 어머니께서 만드신 옷가지를 부치셨네./ 궁핍한 길에 홀로 시를 읊조려도 흥을 두기 어렵고/ 근심하는 곳에 술잔을 드니 효과를 보기 쉽구나./ 스스로 생애가 남쪽 땅에 늙어갈 것을 아니/ 한 줄기 시원한 소리는 북쪽에서 온 기러기일세. 

앞은 가을 밤의 회포를 쓴 시 <추야서회(秋夜書懷)>이고, 뒤는 자암 김구가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 쓴 시 <사향(思鄕)>이다. 벼슬살이 중 환난을 당해 남쪽 끝으로 쫓겨온 신세에 그리운 것이 임금뿐이랴. 겨울 옷 정성스럽게 다듬질해 주던 어머니, 그리고 걱정으로 기득 찬 아버지, 음식과 약을 보내준 아내도 사무치게 그립지 않을 수 없다. 


그립고 그리운

여우도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고향이 그리워 날마다 산봉우리에 오르지만 온갖 장애물뿐이다. 유배지에서 사람 자체가 그리웠다. “하늘 끝에 귀양 와서 사람과 비슷해도 반가운데, 광산 스님이야 오래 전부터 만난 듯 서루 가깝구나”라는 <스님에게 드림[贈僧]>의 시구에서 읽힌다. 

자암은 장악원 악정(樂正)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지금의 국립국악원장 격이다. 음률에 밝아 풍류를 잘 알 터. 여느 조선 선비들처럼 좌금우서(座金右書)의 생활을 즐겼다. 왼손엔 거문고를 오른손엔 책을 들었다. 여기에 자암은 남보다 붓을 놀리는 뛰어난 솜씨도 가졌다. 무엇보다 초서에 뛰어났다. 붓에 먹물을 듬뻑 적셔 초서에 마음을 실어 일필휘지하기도 했다. 가족과 떨어져 절해고도에서 홀로 살아가자면 이보다 좋은 벗은 없었을 것이다. 

자암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배의 괴로움이 덜해지면서 아니 때때로 망각이 되면서 침잠(沈潛)해 갔다. 그런 가운데 남해의 선비들과 어울림도 익숙해져 갔다. 극심한 가뭄이 들은 해에 망운산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기우문(祈雨文)을 짓기도 하는 등 반은 남해 사람이 되었다. 이들과 풍류를 즐기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남해 찬가도 지었다. 바로 경기체가 <화전별곡(花田別曲)>이다. 

하늘의 가이고, 땅의 머리인, 아득히 먼 한 점의 신선 섬에는,/ 왼쪽은 망운산이오, 오른쪽은 금산, 그 사이로 봉내와 고내가 흐르도다./ 산천이 기이하게도 빼어나서 유생ㆍ호걸ㆍ준사들이 모여들매, 인물들이 번성하느니,/ 아! 하늘의 남쪽 경치 좋고 이름난 곳의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노래ㆍ술ㆍ아리따운 여인들과 더불어 모여들었던 한때의 인걸들이,/ 아! 나까지 보태어서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남해 찬가 

(도1) [자암집]에 실려있는 [화전별곡] 작품. (도2) 우리 지역 자암 묘 입구에 세워진[화전별곡] 작품
(도1) [자암집]에 실려있는 [화전별곡] 작품. (도2) 우리 지역 자암 묘 입구에 세워진[화전별곡] 작품

<화전별곡>은 모두 6장으로 되어 있다. 1장은 화전의 경치, 2장은 교우(交友), 3장은 연락(宴樂), 4장은 연락 중의 음악, 5장은 술과 안주의 가멸음, 6장은 자신의 생애를 읊고 있다. 위 노래는 1장이다. 우리말로 풀어 놓은 것이다. 원문(도1)은 거의 한자로 되어 있다.

경기체가는 고려 후기에 발생하여 조선 전기까지 300여 년간 지어졌던 시가다. 향유층이 양반이어 그리 오래 가지 못해 전하는 작품은 30수가 채 안 된다. 그 중 하나가 <화전별곡>이다. 우리 지역 신암 종경리에 김구 묘가 있다. 묘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몇 년 전 여러 비(碑)를 조성해 놓았다. 여기에는 풀어 새겨 놓은 <화전별곡> 비(그림2)가 있다. 화전은 남해의 옛 이름이다. 남해는 이름 그대로 꽃밭이다. 

1장의 첫구의 원문은 “天之涯地之頭一點仙島(천지애지애두일점선도)”다. 자암은 남해를 일점선도(一點仙島) 즉 신선의 섬라고 표현하였다. 500년 전의 유배객 자암에 의해 화전 남해는 신선의 섬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지금 남해는 자암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중국 최남단에 위치한 섬은 하이난섬(海南島)이다. 남해와 지명과 위치에서 다르지 않다. 이 하이난섬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하이난섬은 지금은 관광과 레저의 파라다이스로 불리지만 옛날에는 본토에서 가장 먼 거리에다 해적이 들끓고 원주민들의 난도 잦은 혹독한 유배지였다. 극악의 유배지가 현대에 와서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 것은 우리나라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 하이난섬에 중국이 낳은 최고의 문인 소동파(소동파, 1037~1101)가 926년 전에 유배객으로 들어왔다. 소동파는 이 하이난섬을 하늘 끝이고 바다 끝이라는 ‘천애해각(天涯海角)’으로 묘사했다. 

 중국에서 ‘천애해각(天涯海角)’은 하이난섬을 단적으로 표현한 명구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하이난섬의 풍광과 문화를 담은 소동파의 유배 작품으로 하이난섬은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자암도 소동파와 다르지 않다. 남해를 소동파와 비슷한 ‘천애지두(天涯地頭)’, 그리고 ‘일점선도(一點仙島)’라는 보석 같은 명구를 남긴 자암에 의해 남해는 더 찬란하다고 볼 수 있겠다.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