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 서훈 등록 기준에 따르면 예산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는 총 9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예산군은 그동안 우리지역 출신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유공자들을 매월 1명씩 선정해 누리집과 책자를 통해 알리는 작업에 나섰다. <무한정보>도 이 일에 함께한다.

 

- 1855년 11월 3일~1907년 9월 26일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본적 대술면)

이남규는 충남 예산사람으로 1855년 11월 3일 출생했다.

그는 1861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찍이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해 승문관권지부정자를 거쳐 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향리로 내려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請君臣上下背城一戰疏)’를 올린 뒤 깨끗이 처신할 것을 결심하고 두문불출했다. 1906년 4월 민종식이 의진을 일으켜 홍주에 입성함에 선봉장에 이남규가 임명됐다. 홍주의진이 크나큰 피해를 입고 민종식이 그를 찾아오자 은신처를 제공해 줬다. 홍주의진과 관계가 있다는 일진회원의 밀고가 끊이지 않자, 1907년 8월 19일 적의 군사가 그의 집에 파견됐다. 

“나는 대부(大夫)이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해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하고 교자를 타고 가려고 했다. 아들이 뒤를 쫓았으며, 아산시 송악면 평촌 냇가에 이르러 적군이 칼을 뽑아 그의 아들을 베고자 했다. 

이남규가 아들에게 “서울에 가서 일의 결판을 기다려라. 어찌하여 죽임을 당하고자 하느냐”라며 칼을 손으로 막아 다섯손가락이 잘려 땅에 떨어졌다. 아들 충구가 부친을 보호하고자 했으나, 끝내 두 부자는 함께 죽었다.

이남규는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말과 함께 고귀한 정신을 남기고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2024년 2월) 예산군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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