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시작한 ‘지켜줘서 고마워’와 2014년의 ‘그때 그 간판’의 세 번째 버전 ‘오래된 그 가게’가 찾아갑니다. 30년 이상 된 가게를 찾아 세월을 들어 봅니다. 한 세대를 넘는 긴 시간 동안 존재해 온 가게에서는 물건만 거래되는 것을 아닙니다. 오래된 가게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숨결이 배어 있고, 이웃 간의 넉넉한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래된 그 가게’가 쌓이면 예산의 이야기가 되고, 예산 역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산의 자랑 오래된 가게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편집자>

 

가게들이 찾는 가게가 있다. 삽교 전통시장에서 36년 전부터 터 잡고 각종 그릇과 다양한 생활용품 등을 판매하는 ‘천일상회(대표 김은숙)’는 일반 주민들에게만 유용한 가게가 아니라, 이웃한 신창집(삽교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알려진 곱창식당) 같은 인근 식당들에게도 필요한 그런 가게다.

가게 안에 들어섰을 때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물건들만 해도 냄비, 후라이팬, 칼, 도마, 주걱, 국자, 밥그릇, 국그릇, 접시, 수저, 냉장고 용 김치통 등 주방용품과 고무장갑, 부탄가스, 세제, 스테인리스 용기, 빗자루, 빨래건조대, 소쿠리, 용량별 물통 등 상품들이 즐비하다.

다만, 밝은 조명 아래에 상품들을 단정하게 진열해 놓은 시중 마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순간 멈칫하게 하는 가게일 수도 있겠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채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활용품들이란 것이 사용자가 원하는 용도에 맞는 기능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게다가 가격도 부담 없는데….

가게 안 맨바닥 위 여기저기에 물건들이 무질서하게 진열돼 있는 것 같아도 잠시 숨을 고르고 살펴보니 용도별, 크기별로 분류돼 있음을 알게 된다. 뭐랄까…. 건물의 벽과 지붕만 없다면, 장날 시장에서 볼법한 난전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정겨운 가게다. 아니나 다를까 천일상회는 다양한 행상들이 모이는 장날 장터와 무관하지 않다.

 

1980년 예산읍으로 시집 온 고덕 출신 김은숙(68) 대표는 시부모님을 모시며 당시 시아버지의 그릇 판매일을 돕던 것이 계기가 돼, 40년 넘게 그릇판매업에 종사하고 있다.

삽교 천일상회는 김 대표의 시아버지가 예산상설시장에 기물가게를 운영하면서 삽교 시장에 장이 서는 날이면 노천에서 그릇을 판매하다가 현재의 건물을 인수해 그릇가게를 연 곳으로, 김 대표의 시아주버니가 물려받아 운영하던 가게다.

김 대표는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다가 남편과 함께 분가해 합덕에 세를 얻어 살면서, 합덕장에서 그릇 판매 일을 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작은 형님이 운영하던 삽교 가게를 인수했다”고 한다. 

고정된 장소가 아닌 고덕·합덕·예산·삽교장 등을 돌며 장사를 하던 김 대표가 가게를 인수할 당시 삽교 시장엔 천일상회 외에 2곳의 그릇가게가 있었다. 

한 곳은 행정에서 주차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사라졌고, 나머지 한 곳은 이사 가면서 현재 천일상회가 삽교시장에 남아 있는 유일한 그릇가게가 됐다.

 

10년 전 천일상회 전경. 지난해 가게 앞에 조성된 ‘삽교곱창특화거리’를 제외하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김은숙
10년 전 천일상회 전경. 지난해 가게 앞에 조성된 ‘삽교곱창특화거리’를 제외하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김은숙

김 대표는 “눈치 싸움이 나름대로 치열했다. 안 싸우면 다행이었다. 그 상황에서 저희 가게 장사가 제일 잘 됐다”며 3곳의 그릇가게가 삽교시장에서 경쟁하던 시절을 전한다. 그가 말하는 ‘눈씨 싸움’이란 동일한 상품을 두고 어느 가게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을 유치하느냐를 두고, 이웃 가게들의 동향을 살피는 일을 의미한다.

김은숙 대표는 고인이 된 남편 최기식씨와 천일상회를 운영하면서 1남 1녀를 키웠다. ⓒ 김은숙
김은숙 대표는 고인이 된 남편 최기식씨와 천일상회를 운영하면서 1남 1녀를 키웠다. ⓒ 김은숙

“손님이 물건을 깍아달라고 하면 나는 정해진 물건 값을 단호하게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남편은 늘 ‘예, 예’라고 하면서 응대하니까 손님들이 나 보다는 남편을 더 찾았고, ‘예예 아저씨’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며 “아마도 물건의 정확한 원가를 몰라 어디까지 가격을 깍아줘야 할지 몰라 그런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고객들에게 호감을 줬다”며 14년 전 54세의 나이로 사별한 남편 최기식씨와 함께 가게를 운영할 때의 일화도 전한다. 

“시골에 사시는 어르신들이 전화로 주문하면 남편이 오토바이로 모셔오고, 또 물건과 함께 집까지 태워 드리기도 했다”며 배달 주문 고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장사가 잘 되던 2000년대 초반까지는 “앉아서 제대로 밥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초상집에서 급하게 촛대를 찾는 분들이 있어 어떤 날은 밤 11시까지 문을 열어놨던 적도 있다. 또 새벽부터 가게 앞에서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손님들도 있었다”며 호황기 천일상회를 회상했다.

계절별로 잘 팔리는 물건들이 달랐다. “농촌에서 파종 때나 수확 때가 되면 찾는 물건들이 대체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봄부터 사전에 충분한 물량을 확보해야 한다. 직접 생산공장을 찾아가 한 푼이라도 더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갖다 놓는다”며 “그러다보니 옆 가게들과 같은 물건을 팔아도 저희는 가격 흥정을 탄력적으로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명절 즈음해선 윷놀이 도구를 한번에 50~100개씩 주문을 받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김장철은 김 대표가 연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다. 그는 “1년 벌이, 김장철에 다 하는 것 같다”며 “김치 담글 때 필요한 대형 고무물통, 대형 고무다라 등이 대부분 이때 팔린다”고 말한다.

요즘에야 이런 것도 선물용이냐 싶겠지만 고무대야, 바가지, 수세미, 냄비, 윷놀이 도구 등은 농촌 마을에선 선물용으로 잘 팔렸던 품목들이다. 또 혼수용품으로 요강, 대야, 밥그릇을 찾는 손님들도 있었다는 것이 김 대표의 전언이다.

 

시아버지가 사용하던 주판. 김 대표에게도 익숙한 물건이다. ⓒ 무한정보신문
시아버지가 사용하던 주판. 김 대표에게도 익숙한 물건이다. ⓒ 무한정보신문

시장에서 윷놀이 하다가 싸움이 벌어져 경찰을 부르기도 했다. 우시장(현재 노인회관이 조성돼 있다)이 있던 시기에 삽교시장이 소를 팔고 사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던 시장 분위기. 간식거리가 드물던 그 시절 삽교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호떡을 먹고 들어가곤 했다는 무협담 등을 전하는 김 대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 삽교시장 왁자지껄한 장터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는 “삽교시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확연히 줄기 시작한 것이 천안에서 고속도로가 생기면서부터”라고 기억한다.

“지금은 기다려도 오는 사람들이 없다. 손님들 중 대부분은 어쩌다 급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이고, 우리 나이대나 연세 드신 분들이 대부분이다”라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끝을 흐린다.

마지막으로 “나 한테 잘 팔아줬던 분들이 그립다. 하늘나라에서도 잘 지내시길 바란다. 그분들이 결국 우리 아이들을 키워줬으니까”라며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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