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윙~윙~윙~”

귀 옆 머리카락을 다듬는 ‘사각사각’ 소리가 ‘윙~윙~윙~’ 전동이발기(바리깡) 돌아가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이발사가 머리카락을 하나 둘 다듬는 장면에서, 이발을 구경하는 사람의 모든 신경도 맞춰 움직였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이병주(65) 원장은 대흥면 금곡리 출신이다. 9년 전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 해도 빠짐없이 설날과 한가위 전에 동네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이발을 해주고 있다. 할아버지들뿐만 아니라 할머니들 머리도 만져 준다.

머리를 깎으려고 대기 중인 동네 주민은 “이 친구가 내려와서 설날이나 추석에 머리를 만져 주니까 정말 좋아. 이 사람이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도 따고, 대통령 이발사도 했으니까. 대통령된 기분도 느끼지, 뭐”라며 껄껄 웃는다.

이 원장은 “고향 내려와서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니 너무 좋지요. 좋아! 서울에 살긴 했지만, 굳이 계속 서울에 살 이유는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산 거지”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봉사활동을 하는 것에서, 본인도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말 속에 서울 생활이 꽤 고달팠음이 보인다. 자기가 좋아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원장처럼 어쩔 수 없이 ‘타향살이’를 하던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갔다.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3년 뒤 아버지를 여의었다. 당연히 자립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입 하나 줄이자는 마음으로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70년대 소위 ‘시다’라고 불리던 이발사 조수 역할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어렵게 살다 보니까 ‘기술이라도 배워야지’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형제 가운데 나라도 기술을 열심히 배워, 먹고 살아야 했던 거지요. 젊은 시절에는 친구들이 공부할 때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다 보니 이만큼이나 먹고 사는 거죠”

그는 고향에 내려와, 아산에 있는 온양제일호텔 이발소를 인수했다. 그가 서울에 살면서 어떻게 호텔 이발소를 인수할 수 있었을까? 

앞서 말한 대로 그는 1979년도에 국내 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금메달을 딴 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전국을 돌며 세미나를 통해 여러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그때 아산에서도 연이 닿아 사람들을 알게 됐다.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이·미용 업계에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머리 감기는 법’부터 시작한 그의 이용 기술이 국내 정상을 이뤘으니,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이발에 매진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대통령의 이발사이기도 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마지막 1년 3개월을 청와대 이발사로 근무했다. 

그는 “여의도에서 20년 일 하다가 경찰청 본청으로 들어갔어요. 그 당시만 해도 돈을 떠나서 ‘경찰청에서 일해보고 싶다’ 그런 꿈이 있었어요. 2년 동안 경찰청에서 근무했죠. 당시 경찰총장이 ‘청와대 한 번 같이 가 보자’라는 말에 대통령 이발사를 하게 됐습니다”라고 회상한다.

실제 MB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고, 다만 머리를 다듬을 때면 “열심히 노력해라”라는 말을 해줬다.

예전 그의 집은 금곡리 마을회관 뒤에 있었다. 지금은 옛 집터의 흔적도 없다. 대신 논 건너 ‘텃골’ 입구에 집을 지어 살고 있다. 그가 고향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의 형제 가운데 첫째는 서울에 살고 있고, 셋째는 삽교에서 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 좋아요. 그때는 동창들이 책 들고, 학교 다닐 때 많이 부러워하기도 했죠. 지금은 오히려 나은 점이 있어요. 은퇴하고 중간에 돈 버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라고 웃는다.

그러면서 “고향에 와서 너무 행복하고 좋으니까 그 이상 바랄 게 있겠어요? 동네 어르신들하고 형님들하고 친구들하고 같이 노니까, 그 이상 좋은 게 어디 있어요? 노후의 최고 행복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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