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 서훈 등록 기준에 따르면 예산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는 총 9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예산군은 그동안 우리지역 출신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유공자들을 매월 1명씩 선정해 누리집과 책자를 통해 알리는 작업에 나섰다. <무한정보>도 이 일에 함께한다.



- 1863년 3월 10일 ~ 1935년 7월 3일 

-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본적 예산읍)

남규진은 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최익현으로부터 대중을 격려해 하루 속히 군사를 일으키라는 조언을 듣고 의병에 투신하고자 했다. 이로써 남규진은 을사늑약 이후 민종식, 이용규, 유준근(柳濬根), 이식(李植) 등과 함께 항일을 위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이를 위해 민종식이 가산을 판 돈 2000원을 군자금으로 활용해 군수품을 마련하고 함께 거병한 남규진 등과 1906년 3월 홍주성에 진입해 총기와 탄약을 약탈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돼 이미 성안으로 수송한 총기를 압수당하자, 의병을 일시 해산하고자 했으나 경찰과 헌병이 쳐들어와 겨우 몸을 피했다.

이후 보령군과 결성군(結城郡)을 거쳐 홍주성에 진공했을 때는 일본 헌병과 교전한 끝에 홍주성을 점령하고 총기, 탄약과 기타 무기류를 노획하고 우편국에서 군자금을 확보했다. 당시 함께 했던 의병은 200명에 달했다. 또 홍주성 농성 과정에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명령해 양식과 군기의 징집 및 모병의 일을 주선하고 해미 군수로부터 포군 10명과 금(金) 약간을 모금했다. 

하지만 1906년 5월 31일 홍주성에서 벌어진 대혈전에서 패배할 때 이식, 유준, 신현두(申玄斗), 이상두(李相斗) 등과 함께 체포됐다. 이후 최익현이 대마도로 유배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국하자 신보균과 함께 집사(執事)를 맡아 장례를 준비했다.

1906년 5월 31일 체포돼 대마도로 유배형을 받았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남규진의 독립활동이 확인되는 ‘면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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