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시작한 ‘지켜줘서 고마워’와 2014년의 ‘그때 그 간판’의 세 번째 버전 ‘오래된 그 가게’가 찾아갑니다. 30년 이상 된 가게를 찾아 세월을 들어 봅니다. 한 세대를 넘는 긴 시간 동안 존재해 온 가게에서는 물건만 거래되는 것을 아닙니다. 오래된 가게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숨결이 배어 있고, 이웃 간의 넉넉한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래된 그 가게’가 쌓이면 예산의 이야기가 되고, 예산 역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산의 자랑 오래된 가게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편집자>

 

개업초기 낯선 전기용품 용어로 주문하는 손님을 피하기도 했다는 박명숙씨. 지금은 무엇이든 손님이 찾는 물건을 척척 내놓는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은 겨울이면 찾는 이들이 많다는 축사 보은등이다.    ⓒ 무한정보신문
개업초기 낯선 전기용품 용어로 주문하는 손님을 피하기도 했다는 박명숙씨. 지금은 무엇이든 손님이 찾는 물건을 척척 내놓는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은 겨울이면 찾는 이들이 많다는 축사 보은등이다. ⓒ 무한정보신문

예산상설시장 옆 형제고개로에서 조명기구·전기재료 등을 취급하는 ‘신용조명’은 상호가 말하는대로 고객들의 신용을 바탕으로 32년 동안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예산 주민의 가정에 ‘빛’을 밝혀 왔다.

‘신용조명’은 전업사 직원이었던 남편 김문환씨와 가사에 전념했던 아내 박명숙씨가 지난 1992년에 개업한 가게다.

가게 주인 부부는 고령화, 저출산, 청년인구의 역외 유출 등으로 인한 인구감소 여파로 예산군이 원도심 공동화 문제를 겪을 때도 그럭저럭 견뎠고, 코로나19 위기도 잘 넘겼다. 특히 지난해부터 전국 명소로 떠오르기 시작한 예산상설시장 분위기에 편승해 ‘신용조명’의 경영 주름살도 펼만한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개업당시 외지라 걱정했던 가게
한적해 접근 좋아 장점으로

개업하던 해 ‘신용조명’의 모습. 당시 가게는 부부의 자녀들의 놀이터 이기도 했다.  ⓒ 박명숙
개업하던 해 ‘신용조명’의 모습. 당시 가게는 부부의 자녀들의 놀이터 이기도 했다. ⓒ 박명숙

전기재료, 조명기구 문구가 적힌 가게 유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천장에 빼곡이 매단 전등 갓 밑으로 형광등, 전구소켓, 누전차단기, 전원 스위치 등 각종 전기용품들과 함께 쌀포대, 호박 등 농산물이 나란히 진열돼 있는 탓에 순간 가게를 잘못 찾아 들어왔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게다가 남편 대신 가게를 도맡다시피한 아내 박씨는 마치 시험을 며칠 앞둔 고시생처럼 탁자 위 재봉틀 앞에서 천 가방 만드는 부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조명만을 전문으로 해서는 경영이 녹록치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박씨는 “무겁고 기다란 형광등 대신 요즘엔 가볍고 더 밝아진 LED 등을 취급하긴 하지만, 동시에 예전에 가게에서 필요한 전기용품을 구매하던 고객들이 지금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시대가 되면서, 가게 경기도 10년 전부터 장사가 잘 안됐다”고 넋두리를 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쌀 포대로 향한다. “우리가 직접 농사 지은 건데, 찾는 사람들이 있어 갔다 놨다”고 말한다.

‘신용조명’을 개업하게 된 계기는 남편 김문환씨가 역전 시장에 위치한 전업사 ‘예흥전기’ 직원으로 근무하던 중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 등으로 신체 활동이 젊었을 때만큼 여의치 않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아내 입장에선 가정주부로 있다가 갑자기 시작하게 된 가게였다.

가게 위치를 현재 자리에 정한 것을 두고 박씨는 처음엔 탐탁치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예산상설시장이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 등의 영향으로 전국 명소로 부각되면서 ‘신용조명’ 주변을 오가는 인파도 제법 있지만, 개업 당시 가게 주변 분위기는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박씨는 “솔직히 번화가였던 임성로, 천변로, 예산로 일원에 가게를 열기를 원했다. 하지만 형편상 이곳에 가게 문을 열었다”며 “당시엔 손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게 주변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개업 당시엔 이 곳이 산골짜기라 생각했고 창피했다. 형제고개로를 막 포장하려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지금이야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척척 내놓지만, 누가 ‘뿌렉카(누전차단기)’ 달라는 식으로 일본말로 물건을 찾을 때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쩔 줄 몰라 무서워,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며 개업 초기 서툴렀던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며 웃는다. 

그런데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옛말처럼 한적한 곳에 가게 위치를 정했던 것이 의외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박씨에 따르면 신용조명은 개업 당시 몇가지 운이 겹치면서 시쳇말로 ‘대박’을 쳤다고 한다. 

그는 “중심가 가게를 찾던 손님들이 어느 날부터 ‘여기는 주차하기도 쉬워 마음 편하게 물건을 보고 구매할 수 있어 좋다’”며 “우리 가게를 선호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외지고 한적했던 곳에 터 잡은 가게가 오히려 고객들의 접근 편의성을 높이면서 걱정도 서서히 사라졌다.

 

손님 뜸해도 축사보온등은 이곳
농산물 판매도 ‘쏠쏠’

신용조명의 현재모습.  ⓒ 무한정보신문
신용조명의 현재모습. ⓒ 무한정보신문

이와 함께 신용조명이 개업과 동시에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공교롭게도 개업하던 해 집중호우로 무한천이 범람하면서 발생한 수재가 신용조명에게는 호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당시 물난리로 피해를 입고 고생한 주민들에게는 미안해 했지만, 수재로 집을 잃은 주민들이 정부 보상금으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 전기용품과 조명기구 수요가 한꺼번에 몰렸고, 부부의 일손도 그만큼 바빠졌다.

그는 “1995년 신례원 밑 오가 신원리 일원이 침수되는 물난리가 났다. 정부 지원금으로 제법 많은 시골 집들이 새로 집을 지었다. 보통 한 집에 전기 공사를 하게 되면 22개 정도의 전등이 들어간다. 그땐 하루에 3~4집씩 작업을 했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새 집이니만큼 좋은 전등을 설치하고 싶은 마음에 이왕이면 샹들리에를 주문하는 일이 많았다”며 “한 집에서 달아 달라고 하면, 그걸 보고 너도나도 달아달라고 할 정도로 주문이 폭주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2002년 청양 비봉면에서 한 무속인이 태우던 부적의 불씨가 산에 옮겨 붙으며 예산까지 번진 일이 있었는데, 이때도 피해 주민들이 집을 새로 건축하면서 발생한 전기 관련 일거리 주문이 집중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남편이 10여년 전부터 시골집에서 홀로 지내길 원하시던 어머님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가게 영업은 자연스럽게 아내 몫이 됐다. 

박씨는 “2년 전 시어머님이 9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지만, 남편은 가게 일 보다는 농사에 전념하며 쌀 외에 봄에는 마늘, 감자, 고추, 콩, 팥, 땅콩, 고구마, 옥수수, 참깨, 들깨 등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판매한다”며 “밤골 청정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라고 찾는 사람들이 있다. 농산물을 팔면 그대로 내 돈이 되니까 좋다”고 말했다.

비록 가게 상황이 예전만 못하지만 명절과 농번기를 제외하고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쉬는 날 없이 문을 연다. 특히 겨울이면 소·돼지 보온등이 필요해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수도 동파방지 열선 역시 겨울 주력 판매 상품이다.

향후 계획에 대해 “딱히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나도 가족들도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 나이가 많은 것도 덜 먹은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다. 지금 손 놓으면 뭐하나”라며 “지난해부터 예산상설시장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주차난 때문에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니 사람구경도 못하고 삭막해지는데, 손님이 뜸하긴 해도 가게에 나와 있으면 사람 구경이라도 하니까 그게 좋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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