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시작한 ‘지켜줘서 고마워’와 2014년의 ‘그때 그 간판’의 세 번째 버전 ‘오래된 그 가게’가 찾아갑니다. 30년 이상 된 가게를 찾아 세월을 들어 봅니다. 한 세대를 넘는 긴 시간 동안 존재해 온 가게에서는 물건만 거래되는 것을 아닙니다. 오래된 가게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숨결이 배어 있고, 이웃 간의 넉넉한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래된 그 가게’가 쌓이면 예산의 이야기가 되고, 예산 역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산의 자랑 오래된 가게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편집자>

 

콩나물 시루에 빼곡히 자라는 콩나물처럼, 60~70명의 학생들이 한 반에서 오밀조밀 모여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덕산시장에서 덕산초등학교로 올라가는 얕은 언덕길 옆에서 36년째 ‘옷수선 가게(덕산면 읍내리 352)’를 지켜 온 오희수(74)씨 역시 그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또래 친구들 보다 2년 늦은 10살에 초등학교 문턱을 넘었다고 하니까,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어느덧 64년의 세월히 흐른 셈이다. 

태어난 곳이 삽교 창정리인 오 씨는 당시 인근에 있던 안치초등학교를 갔어야 하지만, 어린 여학생이 걸어서 통학하기엔 길이 험해, 입학을 미루다가 다니게 된 학교가 덕산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덕산면을 떠난적이 없는 토박이다. 외지인들은 모르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는 덕산시장과 이 지역의 변천사에 대해 묻자, “덕산 지역은 30년 전과 비교하면 퇴보하는 것 같아. 덕산중고등학교도 내포로 옮겼고, 덕산초등학교는 내가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한 반에 70명씩 한 학년에 7개 반이 있었으니까, 전교생이 3000명 가량 됐는데, 지금은 몇십명으로 확 줄었지.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회한이 느껴진다. 

 

20년된 페달 재봉틀. 오희수씨는 전동 재봉틀의 편리함을 알지만, 익숙한 수동을 고집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20년된 페달 재봉틀. 오희수씨는 전동 재봉틀의 편리함을 알지만, 익숙한 수동을 고집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오 씨는 오늘도 바지 기장을 줄여달라는 동네 고객들을 맞이하며 반갑게 인사한다. 그는 옷수선 기술을 7년 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 보낸 남편 이창호씨에게서 배웠다. 특별한 상호명 없이 그냥 ‘옷수선 가게’로 통하는 가게 안에는 △소매·바지 기장 줄이기 △단추 구멍 내고, 단추달기 △옷 해진 부분 기우기 △터진 곳 꿰매기 등 그의 손이 필요한 다양한 옷들이 대기하고 있다.

남편의 기술 전수는 특별한 건 아니었다. 26살에 3살 터울 남편과 중매로 만나 이듬해에 약혼·결혼식을 올리고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는 지금의 옷수선 가게와 200여 미터 떨어진 읍내리에서 양복점 ‘남영라사’ 운영했다. 서울 대방동에서 자신의 양복점을 운영했던 남편은 결혼과 함께 덕산으로 내려와 연 첫 번째 가게다.


재단사였던 남편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 평생 업 돼

양복점, 보험회사 지사, 신문사 지국, 당구장, 개인택시 등 다양한 분야에 사업을 펼쳤던 남편은 등산 애호가 였다고 한다. ⓒ 무한정보신문
양복점, 보험회사 지사, 신문사 지국, 당구장, 개인택시 등 다양한 분야에 사업을 펼쳤던 남편은 등산 애호가 였다고 한다. ⓒ 오희수

남편을 도와 바지 단 뜯고, 단추구멍 내는 등의 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옷수선 기술이 오 씨의 평생업이 될 줄이야….

그에 따르면 남편은 다소 ‘돈키호테’ 같은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양복점은 4년 운영했지. 기성복이 나오면서 수지가 맞지 않아 결국 포기했어. 그러다가 시작한 사업이 택시운송사업”이라며 “말이 택시운송사업이지, 운전면허증도 없이 덜컹 택시 1대부터 구입한거야. 운전기사를 고용해 운영하다가 그해 운전면허증을 따고 직접 몰기도 했는데, 1년도 안돼 그만뒀지. 운전을 잘 못했어”라고 한다.

그 뒤 남편의 사업은 보험회사, 신문사지국, 세탁소, 당구장, 건강보조식품 대리점 등 다양한 분야로 이어졌다. 

오 씨는 “직업이 12가지면 먹을 게 없다고 했는데, 딱 그짝이야. 아무튼 (남편이)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 대신 남편 때문에 내가 마음 고생을 좀 했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큰 딸 낳기 전에 옷수선을 시작했으니까 50년 가까이 옷수선을 했지. 그저 옷수선만 매달렸어. 남편은 이 공간에서 조선일보 덕산지국을 한 30년 운영했구. 중간에 동아일보, 한국경제신문도 다뤘는데 조선일보를 가장 오래했어. 그러다가 남편이 7년 전에 암 판정을 받고 그해 세상을 떠나면서, 신문사 지국 일도 자연스럽게 정리한 거야”라며 “지금은 크게 돈 벌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그래도 옷수선을 하면서 용돈벌이 하고, 가겟세 정도는 내니까. 또 시력도 받춰주니까 손을 놓지 않는 거지”라고 설명했다.

최근에 그의 가게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모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나아”라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단골이면 내가 뭐라고 하기가 좀 그래.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 같아”라며 “장날이면 시장 나오는 길에 옷수선을 맡기는 손님들이 아직은 있는 편이야”라고 설명한다. 

“시장도 그렇고 지역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건 없지. 나이드신 분들이 하나 둘씩 안 뵈는 것, 그게 변화라면 변화겠지”라며 가게 앞 약국 노부부의 사연을 들려줬다.

“그 약국가게 아저씨가 90세가 넘었어. 지난해까지만 해도 운영했는데 올해 그만뒀어”라는 말에선 안타까움과 비켜갈 수 없는 세월의 힘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엿보였다.

 

48년전 남편이 양복점을 운영할 때부터 사용하던 오버록 기계. 가끔 말썽을 피우지만 지금도 큰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다(왼쪽). 가게를 그만두더라도 챙기고 싶다는 스팀다리미(오른쪽). ⓒ 무한정보신문
48년전 남편이 양복점을 운영할 때부터 사용하던 오버록 기계. 가끔 말썽을 피우지만 지금도 큰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다(왼쪽). 가게를 그만두더라도 챙기고 싶다는 스팀다리미(오른쪽). ⓒ 무한정보신문

오 씨는 최근 옷수선 외에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소일거리 하나를 찾았다. 그는 매일 오전 8시부터 통학시간에 덕산초등학교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교통안전지킴’이로 나선 것.

근무 장소는 가게 안에서 바로 보이는 횡단보도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에 1시간 정도 교통안전지킴이를 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수고비로 월세에 보태 쓴다”며 “아이들 등교시간 전후로 가게는 교통안전지킴이들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고 전했다.


택시 사업·신문사 지국 등
우여곡절 끝에 남은 ‘옷수선’

비록 4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47년전 ‘남영라사’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사용했던 ‘오버록’ 기계가 가게 안쪽에 자리를 잡고, 오 씨와 옷수선 가게의 오래된 역사를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마침, 그를 찾은 한 고객은 오 씨에 대해 “참 한결 같은 사람이예요.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가지. 옷수선할 일이 있으면 항상 여기로 와”라며 그의 성품을 설명했다.

 

옷수선을 맡기러 온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옷수선을 맡기러 온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벽에 기댄채 가지런히 놓여있는 20년 됐다는 수동 재봉틀, 철제 재단 탁자, 15년 된 스팀 다리미, 종류별 실타래를 보관하는 수납장 등이 원래 있어야할 곳에 있던 것처럼 처음보는 이들에게도 금새 익숙해졌다. 

“재봉틀은 한 번 바꾸긴 했는데, 자동이 아닌 발로 페달을 밟아 작동하는 수동 미싱으로 바꿨지. 앞으로 2~3년 더 할 수 있으려나. 이 가게도 그만두면 재봉틀과 다리미는 집으로 가져가서 필요할 때 사용할 거고, 나머지는 정리해야지”라는 그의 말이 왠지 숙연해지면서도 오랜 시간 우여곡절을 겪은 뒤 느끼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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