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언서
박언서

가을걷이가 막바지다.

가을 일이 대충 마무리되니 바람도 날이 섰고, 비 대신 첫눈이 내렸다. 가을걷이는 끝나 가지만 농부의 걱정은 이제 시작이다. 당장 1년 농사의 성적표와도 같은 추곡수매를 앞두고 있다. 물론 논두렁에 심어둔 콩도 털어야 한다. 그뿐인가?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도 해야 한다. 걱정의 크기에 상관없이 먼저 닥칠 일이 더 걱정이다. 바로 추곡수매다. 

요즘은 추수하고 건조하는데 일손이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벼를 베는 일만 해도 여러 날이 걸렸다. 탈곡해 말리고 풍구로 부쳐서 매상 포대에 담았다. 저울로 무게를 맞추는 것까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그래도 추곡수매에서 등급을 잘 받으려면 그만한 수고는 감내해야 한다.

농부의 걱정은 끝이 없다.

농사를 잘 지어도 걱정, 못 지어도 걱정이다. 다른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매년 껑충껑충 뛰지만 쌀값만은 늘 제자리다. 게다가 쌀 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밥상은 식탁으로 변했고, 잘 차려진 밥상 대신 빵이나 야채 따위가 오른 식탁을 마주한다. 그러다 보니 아예 아침을 먹지 않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결국 쌀생산량 대비 소비량이 줄어들어 가격 상승 요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업을 포기할 수도 없다. 농업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국가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농업과 농민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각종 보조금이나 농업 직불금 등을 지원하고 있다.

엊그제 추곡수매를 마쳤다.

예전 같으면 수매하는 날은 잔칫날이나 다름 없었다. 이른 새벽 우마차에 볏가마를 가득 싣고 서둘러 수매장으로 가야 했다. 마을별로 볏가마를 쌓아 놓지만 도착한 순서에 따라 수매가 시작되니 마음이 바빠진다.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오다 보니 수매장 주변 막걸리 집이 덩달아 분주해진다. 공무원이나 검사관이 나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시끌벅적한 막걸릿집에서부터 수매가 시작된 것이다. 따뜻하게 데운 막걸리 한 사발에 얼큰한 돼지고기 김치찌개 한 술이면 걱정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수매장은 하루 종일 분주하고 어수선하다. 이른 아침부터 속을 데워준 막걸리는 저녁까지 이어진다. 어떤 이는 등급을 잘 받아 기분이 좋지만, 또 다른 이는 등급을 잘 못 받아 서운한 마음을 막걸리 한 사발에 삼킨다.

이렇듯 농부는 성적표와도 같은 수매전표와 막걸리 사발을 손에 들고 쓴 웃음으로 시름을 달랜다. 수매가 끝나면 등급에 따라 가격에 차이는 있지만 농부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는 이때가 전부다. 하지만 목돈이 들어오기도 전에 농부는 이미 쓸 곳이 다 정해져 있다. 

여기저기 외상값을 갚고, 농사 도구도 새로 장만해 내년 농사를 준비해야 한다. 매번 눈인사만 나누고 지나치던 정육점에도 들러 돼지고기 몇 근 신문지에 싸들고 비틀비틀 집으로 간다. 수매등급이야 숫자에 불과하지만 속주머니에 두툼하게 잡히는 지폐다발은 그 자체로 가슴 한 쪽이 뜨뜻해진다. 올해 농사도 이만하면 됐지, 다 하늘이 하는 일인걸로 치고, 고단한 몸을 아랫목에 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가 본 수매장은 우마차 대신 트럭과 트랙터, 지게차가 제일 바쁘다. 주머니에 손 질러넣고 어슬렁거리다 아는 얼굴을 만난다 해도 그 뿐이다. 디지털장비로 무게를 달고 수분을 측정한다. 두툼한 돈다발 대신 몇자리의 숫자가 디지털로 전송될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 농부의 성적표는 오롯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그 풍경이 달라질 리 없다. 농사는 여전히 하늘이 하는 일이고, 농부는 오늘도 막걸리 한 잔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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