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들으면 영영 잊어버릴 것 같지 않는 상호로 60년 동안 운영하는 이발소가 있다.

삽교면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위치한 ‘이왕이용원’. “이왕이면 이리로 와”라는 의미에서 ‘이왕’이라는 상호를 정했다고 말하는 주인 박창제(82)씨는 오래된 이용원 가게 건물 만큼이나, 그의 나이도 어느덧 여든을 훌쩍 넘겼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40대 후반만 되도 서서히 찾아오는 노안 때문에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박씨는 지금도 안경 없이 너끈히 이발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뿐이다.

그는 “아직은 눈도 좋고 아픈데도 없다. 시력이 오른쪽 2.0, 왼쪽 1.2다. 잔글씨도 다볼 정도로 눈이 좋다”며 건강을 과시한다.

하긴, 이제는 안경을 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눈을 감고도 이발할 수 있는 수준의 내공을 쌓지 않았을까? 이발 경력 60년, 한 분야에서 이만한 시간동안의 경험을 통해 도달하게 될 경지는 과연 어느 수준일까? 

 

박창제 대표. 19세 때 동네 선배의 권유로 맺은 이발업에 60년 넘게 종사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그러자 “에이, 그러다 귀 자르면 어떻하려구. 눈감고 이발했다간 큰 일 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도, 이 말 한마디에 고객을 대하는 베테랑 이발사의 태도, 나아가 그 안에 담긴 신중함과 이발 철학까지 단번에 느낄 수 있어 더욱 신뢰가 간다.

그가 젊은 시절 같은 동네 이발사로부터 어렵게 이발 기술을 익혔던 이야기를 들을 땐,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뎠을까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형뻘 되는 사람인데, 현대이발관 주인이었던 현종열씨한테 기술을 배웠어. 처음엔 ‘하루에 80리를 걷는 것과 같다. 할만 하겠어’라는 말을 하더라구. 이발하랴 머리감기랴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지. 그 양반이 이북에서 면허를 딴 사람이거든. 그분 밑에서 이용기술을 배웠어. 머리감는 것부터 배워. 좀 나아지면 면도칼을, 그 다음엔 가위질 배우는 거야. 옆에 서서 어떻게 이발하는지 눈썰미로 익혀야 해. 그러다 자리에 앉아 졸기라도 하면 가위 잔댕이로 머리를 한 때씩 얻어 맞고 그랬지.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고….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라며 그시절을 회고한다.


전성기 6~7명 직원 두고 하루 50여명 손님 받기도

그는 여기서 2~3년 이용기술을 배웠다. 군복무 기간 3년을 제외하고 열아홉살 때부터 62년 동안 손에서 이발 가위를 놓지 않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또 다른 동네 이발소인 중앙이용원에서 한달 정도 직원으로 근무하다 1964년 독립해 ‘이왕이용원’이라는 이름으로 삽교읍사무소 앞에 가게를 열었다. 첫 가게터는 새건물이 들어서면서 헐렸고, 1976년 5월 1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개업하고 종업원을 6~7명씩 둘 정도로 손님이 많았어. 대개 읍사무소 직원들이었지. 그때는 공무원들이 출근 전에 이발한다고 새벽부터 가게를 들렀기 때문에 나도 5시에 밥 먹고 이발소에 나올 때도 있었어”라며 전성기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하루에 50~60명 정도 손님을 받기도 했고, 그의 손길에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진 손님은 그에게 특별히 ‘무얼 어떻게 깍아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박씨 역시 단골손님이 오면, 굳이 묻지 않는다.

기억나는 손님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생호 공무원인데, 정년퇴임 뒤 천안으로 이사 갔어. 지금도 이발하러 여기로 와. 내가 깎던 양반이니까. 내가 알아서 깎지. 제일 멀리서 오는 사람이 목사님인데 인천에서 왔지. 몸이 불편한지 요새는 오지 않네”라면서, “나는 단골들이 많아”라고 자랑했다. 왜, 아니겠나. 반세기를 넘겨 운영하는 ‘이왕이용원’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학생들은 대개 빡빡머리로 깎는데, 중고등학생들의 경우 스포츠머리다. 공무원들은 기름을 바르고, 고데로 머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 많았다. 가르마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타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렇게 머리를 하면 성인은 1500~2000원, 학생들은 800~1000원 정도 받았다.

의외의 손님들도 있었다. “여자들도 드물지만 가끔 왔었어. 턱과 입주변에 면도해달라는 거였는데, 화장을 잘 받게 하기 위해서였지”라고 들려줬다. 요즘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개업할 때부터 사용했던 바리깡·소독용 알콜램프·면도칼.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박씨는 죽을 때 가지고 가고 싶어할 만큼 아끼는 도구들이다. ⓒ 무한정보신문
개업할 때부터 사용했던 바리깡·소독용 알콜램프·면도칼.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박씨는 죽을 때 가지고 가고 싶어할 만큼 아끼는 도구들이다. ⓒ 무한정보신문

그는 이용원 문쪽 구석에 작은 보관함에서 녹슨 바리깡·면도칼, 소독용 알콜램프를 꺼내 보이며, “내가 죽을 때까지 간직할 물건들이라 안 버린다”라고 소개한다. 이발소 개업 때부터 사용하던 도구들이다. 지금은 물론 사용하진 않지만 가끔씩 꺼내 기름칠을 하며 유지·관리한다. 한 손으로 직접 바리깡을 작동시키며 “지금도 쌩생혀”라고 환하게 웃는다. 이 이발 도구들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보란 듯이 키웠다.

그는 이용원뿐만 아니라 7살 아래인 아내와 신가리 집에 거주하며, 100여평 남짓되는 텃밭과 삽교 두리에 위치한 3200평 논에서 농사도 짓는다. 


돈 벌어 먼저 논 매입, 쌀밥 먹고 싶어서

이용원 문 위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 역시 60년이 넘었다. 태엽만 감으면 잘 작동한다. ⓒ 무한정보신문
이용원 문 위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 역시 60년이 넘었다. 태엽만 감으면 잘 작동한다. ⓒ 무한정보신문

그는 “이용원 운영으로 큰 돈을 벌진 못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번 돈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이 논을 산 것”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쌀밥을 먹고 싶어서”였고, 지금껏 이용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잘한 일 같다”고 말한다.

‘이왕이용원’은 오전 6시 30분에 문을 열고 해가 떨어지면 퇴근한다. 조금 늦게 하면 8시까지 운영한다. 정기휴일은 매월 삽교장날 다음날인 1·8일, 장날 전날인 16·18일이다. 

두리에서 태어나 삽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릴 적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것이 늘 한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중학교 입학식날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던 일을 지금도 못 잊어. 미리 입학 신청을 하고 돈도 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지. 부모님 형편이 어려워 간신히 밥만 먹고 살았어”라며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고 시작한 게 이발소야. 그때 이발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없어. 다들 어렵게 살았지”라고 회고한다. 

이용원 문 위쪽 아담한 괘종시계가 시선을 끈다. 시계 중심 양쪽에 태엽 감는 구멍만 보더라도 꽤 연식이 돼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역시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물건이야. 지금도 한 번 태엽을 감아놓은 1주일은 너끈히 가. 시간에 맞춰 종소리도 내”라며 시계를 가리킨다.

불현듯 그의 이마에 골 깊은 주름이 보인다. 언젠가 괘종시계도 멈출 것이다. 이발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생각날 것 같은 시계다. 그땐 이왕이면 가보고 싶은 이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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