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정보>가 30년 이상 된 가게를 찾아갑니다. 한 세대를 넘는 긴 시간 동안 존재해 온 가게에서는 물건만 거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가게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숨결이 배어 있고, 이웃 간의 넉넉한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래된 그 가게’가 쌓이면 예산의 이야기가 되고, 예산 역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산의 자랑, 오래된 가게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편집자>



오가초등학교 옆 도로변에 위치한 15평 남짓한 규모의 아담한 떡방앗간. 고추를 빻고, 기름을 짜며, 떡을 찌는 등 여느 방앗간과 크게 다를게 없지만, 방앗간 주인 장석종(82)·문성근(70) 부부가 1990년에 인수해 같은 장소에서 33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는 사연을 알게 되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상호도 33년 전 ‘역말떡방앗간’ 이름 그대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이루 말 못할 우여곡절과 경기 부침을 견디고 옛 모습 그대로인 ‘역말떡방앗간’을 향한 눈길과 마음이 더 간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새로운 것에 대한 화수분 같은 호기심으로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이지만, 30년 넘게 옛 모습 그대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름을 사용하며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의 모습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감동과 생경함은 관찰자의 입장에서나 통하는 법, 당사자들에겐 남모를 속사정이 있기 마련. 

남편 장석종씨는 방앗간을 인수하기 전에 부여에서 옹기 제작일을 하기도 했다. 

건강이 안 좋아져서 다시 예산으로 이사와 오가에 거처를 마련한 뒤에도 남편 장씨는 옹기 회사 사택살이하면서 옹기제작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역말 떡방앗간과의 인연은 아내가 방앗간 일을 하면서부터다.

 

주인 부부가 1990년에 인수해 지금까지 같은 자리, 같은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는 방앗간 전경. 뒤로 오가초등학교가 보인다. ⓒ 무한정보신문
주인 부부가 1990년에 인수해 지금까지 같은 자리, 같은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는 방앗간 전경. 뒤로 오가초등학교가 보인다. ⓒ 무한정보신문

현재의 ‘역말떡방앗간’은 주인부부가 처음 인수했을 때의 모습과 다르다.

“2004년에 화재가 났어요. 전기 합선인지 아니면 기름짜고 남은 깻묵에 불이 난 건지 몰라요. 그래서 집을 새로 지었지, 그 전에는 흙집이었어요. 지붕도 낡아 다 내려 앉을 판이었는데, 아무튼 방앗간이 불이 나는 바람에 그나마 이 정도로 집을 짓게 된거쥬”라며 회상했다. 

흙으로 만든 예전 건물은 단열을 위해 지붕에 왕겨를 넣은 집이었는데, 주인 부부는 “사람이 살기 열악한 집”이었다고 한다.

대신 위치는 좋았다. “기동력이 안 되는 분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곳이죠. 주문량이 많으면 저희가 가지러 가면되는데, 한 두말이면 움직이기가 그렇잖아요. 그래서 오고가며 가게 앞에 떨구어 놓고 가기 좋은 위치”라며 목 좋은 위치에 자리한 가게 자랑을 했다.

 

한 고객이 들고 온 고추를 주인부부가 즉석에서 고춧가루로 빻아 고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한 고객이 들고 온 고추를 주인부부가 즉석에서 고춧가루로 빻아 고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마침, 이날 커다란 비닐 봉투에 담긴 빨간 고추를 실은 트럭이 방앗간 앞에 정차돼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더니, “오늘 오전에도 35근 고추 빻는 주문을 받아 처리했어요. 그 정도면 1시간이면 돼요”라고 설명했다. 

방앗간을 방문했을 때 노부부는 키낮은 의자에 나란이 앉아 송편을 빚고 있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부지런히 동그랗게 다듬은 송편피에 고물을 얹으며, 아내 문씨와 주로 대화를 이어갔다. 다가올 추석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주문이 뜸한 시기에 판매용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도톰한 새하얀 송편피에 재팥고물, 빨간팥고물, 콩고물을 수북하게 담아 빚어내니 어느새 아이 주먹 크기만한 떡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요즘 같은 여름 방앗간은 비수기예요. 김장철인 10~11월이나, 설명절, 추석명절에 바쁘지. 전화로 미리 예약한 주문이 있으면 일찍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여유있게 나온다”며 방앗간 분위기를 전했다.

아내 문성근씨는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했었다. ‘말을 잘 못한다’, ‘쑥스럽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빼꼼히 문이 열려 있는 방앗간을 찾아 명함을 내밀자, 그제서야 결혼이야기, 자녀 이야기 등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둘씩 풀었다. 

나이를 묻자 처음엔 밝히기를 주저하다가 나이는 20을 세 번넘겼다고 퉁친다. 이름은 손사래를 치며 남자이름 같다고 밝히기를 주저하길래, 더 궁금해 연신 물었더니, 그제야 “‘문성근’인데, 호적에는 ‘ㅇ’이 ‘ㄴ’으로 돼 있어요. 남자 이름 같아요”라며 멋쩍어 했다.

“배우 이름과 같아 한 번 들으면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한바탕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남편의 고향은 예산군 봉산이고, 부인의 고향은 청양이다. 어떻게 만났는지 묻자 이번엔 남편이 “중매로 만났지. 일 잘하고 살림 잘할 것 같았다”며 아내에 대한 첫인상을 전했다. 한 곳에서 30년 이상 가게를 운영하며 강한 의지로 억척스럽게 살아온 아내의 모습에서 그의 첫인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내는 “전 주인이 가게를 정리하고 경기도 안성으로 떠나면서 전 주인의 권유로 없는 살림에 빚을 내 인수했쥬”라며 “처음엔 기주(술떡)를 잘못 만들어 땅속에 묻기도 했을 만큼 어려움도 수없이 많았슈~”라고 초창기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들려줬다. 

현재 부부가 살고 있는 집도 오가에 있다. 방앗간과도 멀지 않다. 아내는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유”라는 말로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2~3년 마을에 빈집들이 부쩍 늘었어요. 노인 양반들 많이 돌아가시고 일거리도 많이 줄었어요. 그나마 단골들이 있어 운영할 수 있는 거쥬”라고 옅은 한 숨을 쉬었다.

오랜 시간 한결같이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냥 먹고 살려고 하는거지, 비결이 어디 있간디? 장사가 안 돼 과수원 적과 하러다니고, 은행잎 따러 다니는 일도 하고 그랬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말대로 방앗간의 여름은 비수기다. 일거리가 없는 날이 많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손을 놀릴 수는 없는 법. 노부부는 사이좋게 방앗간을 지키며 송편을 빚어 파는 것이다. 햇고추가 나올 무렵부터 바빠지기 시작한다. 겨울엔 흰떡을 주문하는 고객이 많아진다. 뽑은 떡도 썰어줘야 한다. 노인들이라 떡을 써는 것도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부부는 슬하에 첫째와 둘째가 딸이고, 셋째가 아들이다. 장녀는 예산사람과, 차녀는 일산사람과 결혼했는데 모두 예산에 산다. 

손자이야기로 넘어가자 얼굴에 어느새 화색이 돌았다. “딸들은 딸만 낳고, 아들은 아들만 낳았어요. 첫째 딸 손녀는 중부대학 졸업반이고, 둘째 딸 손녀는 올해 이화여대에 들어갔지. 아들 손자는 내년에 대학 들어가요. 다 손주 보는 낙으로 사는 거쥬”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영락없는 여느 자상한 할머니 그대로다.

“무거운 거 옮기는 일이 상 노가다야”라며 방앗간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따로 사람을 쓰지 않고 오로지 부부가 방앗간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언제까지 운영할지에 대해 “기한을 두진 않았어요. 하는 데까지 해야지…. 아들도 이어 받을려고 하지 않아”라며 부부가 일을 그만 둔 뒤의 방앗간의 운명에 대해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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