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토론을 펼치고 있다.     ⓒ 대한독립군 윤자형 대원수 기념사업회
전문가들이 토론을 펼치고 있다. ⓒ 대한독립군 윤자형 대원수 기념사업회

예산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오정 윤자형(1868~1939) 선생’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증손자 윤흥기씨에 따르면 그는 오가 원천리에서 태어나 1891년(고종 28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지냈으며, 병서와 경서를 두루 섭렵한 문무겸전의 지장으로 활약했다.

항일무장독립투쟁사에 등장한 시기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청·일·러가 각축을 벌이던 국면과 겹친다.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해산될 당시 고종의 군참모였다. 

윤 선생은 러일전쟁 직후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일제가 강제조인한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으로 행정·사법 등 내정 전반에 대한 권한을 빼앗기자 의병을 모집해 지리산에서 대일 항전하던 중 고종의 칙령을 받들어 ‘대원수’ 자격으로 만주에서 북로군정서 태동의 산파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가 수행한 역할이 거의 가려져 있는 탓에 서훈 4등급인 애국장에 머물러 있다.

대한독립군윤자형대원수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위원장 전용식)는 4월 21일 예산군청소년수련관에서 학술세미나를 열어 윤 선생의 삶, 사상, 활동 등을 조명했다.

이날 김태금 의원은 ‘예산의 큰 인물 윤자형의 성격과 의의’라는 기조강연으로 문을 열었다. 그는 “윤 대원수의 묘역은 ‘일본놈 꼴을 보기 싫다’는 생전유언에 따라 예산읍 관작리 치유의숲 내 험악한 곳에 위치해 있다. 임도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길이 없고 가팔라 수시로 민원이 제기된다”며 “애국지사 묘역관리를 이렇게 하는 것은 부끄럽다. 최소한 묘소로 가는 계단이라도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1발제는 전재진 작가가 ‘대한독립군 군통수권자’를 주제로 항일독립투쟁사에 윤 선생의 공적이 누락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일제가 항복한 뒤 미Q군정과 이승만정권은 만주독립전쟁을 무시·방임·방치했다. 조선정규군 군통수권자였던 대원수 윤자형의 공적을 묵살하고 덮어버림으로써 민족자존을 상실했다”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중국 동포사회 인사들과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소와 함께 조사·연구해 역사정립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고종황제가 윤자형에게 제수한 칙명. ⓒ 대한독립군 윤자형 대원수 기념사업회
고종황제가 윤자형에게 제수한 칙명. ⓒ 대한독립군 윤자형 대원수 기념사업회

제2발제에 나선 한만봉 전북대학교 교수는 ‘윤자형의 민족계몽사상 연구’를 통해 “윤자형의 원각교, 삼황교 활동은 국민 계몽을 통한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며 “소외되고 착취당하던 민중들이 본래의 권리를 확보하고, 의식있는 민족으로 살 수 있도록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워 준 윤자형의 성찰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발제는 이동호 국학원 연구원이 ‘신민부에 관한 새로운 고찰과 윤자형’을 발표했다. 그는 “독립지사 관련 새로운 다른 증언들이 만주에서 살아남은 후손들에 의해 채록됐다. 구체적인 자료들로 인해 앞으로의 성과가 기대되는 만큼 한시바삐 흩어져 있는 만주독립운동사를 모아야 한다”며 “중국 연변대학교 등에서 이뤄졌던 학술적 성과를 교차 검토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종합토의에선 전용식 위원장이 좌장을 맡아 배상목 혜전대학교 교수, 조복화 한국중앙교육원 교수, 이수용 국학원 연구위원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전 위원장은 “오늘이 시작이다. 윤자형 대원수와 관련된 연구는 제3자의 시각과 관점에서 조명돼야 빛을 발한다”며 “우리 추진위원회 구성원 모두 사사로운 욕심이 있었다면 오늘의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을 계기로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모으는 작업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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