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1970년대는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여학생들도 교련교육을 받았다. 남학생들처럼 총검술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여학생들도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하고 열병식도 하고 그랬다.그때 교련을 담당했던 이성림 선생님은 예비역 대령이었는데 군 출신답지 않게 선한 인상에 부드러운 분이었다. 제식훈련을 할 때도 학생들을 심하게 다루지 않았고, 이론수업도 자상하게 잘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전략전술이나 화생방전 등에 대해서 배웠다. 이 선생님은 동서냉전이나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는데 미국이나 소련 등의 강대국들은 어느 한
안상천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분이다. 안 선생님이 시문학에 있어서 비유의 한 방법인 공감각적 표현을 설명하면서 김광균의 시 을 예로 들어주신 것이 생각난다. 이 시의 맨 끝 행에 나오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는 청각인 종소리를 시각화한 공감각적인 표현이다. 비슷한 예로 유치환의 시 의 첫 행에 나오는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표현도 있는데 전자와는 반대로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시각)을 아우성(청각)으로 비유한 것이다. 1930년대에 김기림, 김광균, 정지용 등의 이른
‘충남 예산군 삽교읍’ 하면 키워드로 ‘삽교역’ ‘삽교꽃산’ ‘삽교곱창’ ‘삽다리’ ‘삽교평야’ 연예인 ‘최주봉’ ‘박광덕’ ‘조영남’ 등이 떠오른다. 최근에는 ‘삽교곱창’ ‘삽교국밥’이 유명하다. 예산출신 백종원이 TV에 나와 방송되어 그 덕에 전국에 알려졌다,그 전에는 소설가, 방송극작가 추식(秋湜, 1920~1987.5.10)의 KBS라디오 연속극 이 유명세 누렸다.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큰 누나와 형은 저녁때가 되면 라디오를 서로 들으려고 이불 속에 숨기곤 했다. 남녀노소 가족이 모여 라디오 연
내가 다녔던 대전여자고등학교는 원래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우던 학교였는데 총각선생님은 받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아마도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총각선생님과 여학생들 사이의 스캔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 같다. 내가 대전여고에 입학하던 해에 독어 선생님을 1명 더 충원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올 수 있는 사람이 총각선생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처음 한 달 동안 우리는 기존에 있던 이진원이란 여자 독어 선생님에게 독어를 배웠는데 그분이 우리 반의 담임도 맡았었다. 한 달 후에 궁여지책으로 기혼자인 불어 선생님을 모셔왔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환·환불이 편리하고 소비활동에 최적화된 대형 마트가 등장함에 따라 소비자들이 전통시장으로부터 발길을 돌리고 있어 현재 지역시장은 매우 침체되어 있다.삽교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예전과 같은 장날 풍경은 이제 어른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며, 상주하는 인구도 줄고 유동인구조차 줄어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적다보니 구매자 보다 상인들이 더 많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이에 삽교고 NIE 동아리는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삽교오일장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고, 시장 활성화를 위한 지역사회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자 설문조사를
광시중학교 학생들이 6월5일, 다음날 현충일을 맞이하여 오후시간을 이용해 예산에 있는 3명(최익현, 윤봉길, 김한종)의 독립운동가를 찾았다.예산군에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3분이나 계시니 참 자랑스러운 일이다.먼저 면암 최익현 묘소를 찾아가 묵념을 하고 참배를 하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은 많은 것을 느꼈고, 배웠다. 풀도 크게 자라있고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을 꿋꿋히 견디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했다. 두번째로 덕산에 있는 충의사를 갔다. 도착 후 향을 피워드리고 매헌 윤봉길의사를 주제로 한 컨셉
나의 고향 예산은 천년고찰 수덕사, 명필 추사 김정희, 독립투사 윤봉길 의사 등으로 유명한 고장이지만 낚시터로 이름난 예당저수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당저수지는 충남 예산군의 대흥면과 응봉면 사이에 있는 저수지로 예산군에서 당진시에 걸쳐있는 넓은 홍문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상류의 집수면적이 넓어 민물고기가 풍부하기 때문에 주말이면 전국각지에서 태공들이 몰려들어 낚싯대를 드리우는 곳이다.내 아버지도 낚시를 좋아하셨다. 사실 아버지가 좀 젊었을 때는 낚시가 아니라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으셨다. 주
광시중학교 학생들이 5월8일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6,7교시 시간을 활용해 광시지역에 있는 예당 행복노인요양원에 가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전에는 항상 신양에 있는 황계 노인 요양원으로 봉사를 갔었지만 이젠 광시지역에도 노인 요양원이 생겨 지역사회에 계신 어르신들을 위로하고 함께 행복한 시간을보내니 참 좋은 일 이다.학생들은 요양원에 도착하여 원장님께 어르신을 대하는 예의에 대해 설명을 듣고 어르신들이 계시는 2층으로 올라갔다.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학생들이 준비한 수화공연과 교감선생님&3학년 여학생들의 트로트
취재수첩을 보고 유투브에 들어가 토론회 상황을 보았다. 일부 후보자들이 왜 토론회를 거부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토론회를 통하여 자기 생각과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알릴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만 것이다.사람은 말을 하면서 산다. 말은 당장에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생각을 간직했다가 여러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이 말하는 말씨를 통하여 평소에 성격이 급한 사람인지, 차분한 사람인지, 일상적으로 거칠거나 경솔한 사람인지, 후보자들의 자질과 사람 됨됨의 일면을 엿볼 수
나의 어린 시절에 보았던 또 다른 만화영화들로는 , , , 같은 것들이 있었다.는 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기획하고 한국에 하청을 주어서 1967년에 제작한 한일합작 애니메이션이었다. 물론 내가 그 만화를 볼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본 것이었다. 이 만화는 몇 번밖에 안 봐서 잘 생각나지는 않는데 해골형상의 황금박쥐가 망토를 펄럭이며 날아와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이 만화를 본 아이들은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아침 6시, 평소라면 주말이라고 늦잠을 잤겠지만 오늘은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2달 전부터 계획하고 기다리던 서울 도성 투어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1학년 도성 투어 때는 숙정문(북대문), 흥인지문(동대문)에 다녀왔었는데 이번에는 숭례문(남대문)에 갈 예정이었다. 전날 수학여행을 다녀온 터라 조금은 힘들었지만 선생님의 말씀대로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3박 4일 수학여행을 간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집을 나섰다.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거의 다 되었고 선생님과 애들도 모여 기차에 탑승하였다. 가는 동안 선생님과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니 2시간이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다. 나의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때 2년간 담임을 맡았던 김진숙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야무지게 생긴 외모에 똑 소리 나게 잘 가르쳤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하셨다. 김 선생님은 전라도 남원 출신으로 대학교는 공주사범대학을 나오셨다. 처음 부임해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주셨는데 그중의 하나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것이었다. 물건이 가득 실려 있는 수레는 굴러갈 때 소리가 안 나지만, 빈 수레일수록 덜컹거리는 소리가 크게 난다. 별로 아는 것
현 정부의 중점 국정운영 과제인 수사구조개혁은 단순히 권한이 집중된 검찰의 부정적 유산의 청산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 비리를 척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그렇다면 수사구조개혁이 실현됨으로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기대효과는 무엇일까?첫째로 국민의 인권 보호 및 편익이 향상된다. 수사는 경찰이, 기소는 검찰이 담당하여 경찰수사의 책임성과 객관적 사후 통제가 확보됨으로써 인권이 보호되고 검찰 지배적 수사구조에서 탈피하여 상호 견제와 협력으로 국민지향적인 형사사법서비스를 펼쳐가는 문화가 형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82주년을 기리며 개최된 ‘제9회 윤봉길 평화의 길 걷기’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윤 의사께서 해방의 뜻을 품고 도중도에서 옛 삽교역(현재 삽다리공원)까지 걸어오신 길을 되짚어 걸어가며 참가자들은 윤봉길 의사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특히 윤의사의 유해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지만 넋이라도 고향으로 모시자는 행사의 취지에 공감한 친구들은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윤 의사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워보
함평이씨 대흥공파 17대 종손으로97세이신 나의 아버지!마지막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손톱을 깎아드렸다.평생을 종사 일에만 신경 쓰고 가족을 돌보지 않아어머니를 힘들게 하셨던 아버지.그래서 나는 어린시절 추억은가슴 아픈 기억이 더 많다.예산에 내려온 지 3년 3개월.가슴 속에는 온갖 슬픈 단어들이 자리하고아버지의 마지막 여정을 지켜보면서내 삶의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고비가 있을 때마다아직 이별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떼 쓰듯이하느님께 기도했다.누워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이제는 보내 드린다고편하게 계시다 좋은 곳 가시라고그런데
충남에 살고 있는 김아무개(28)씨는 최근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친한 언니로부터 안부 인사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잘 지낸다는 인사와 함께 근황을 이야기 하던 중, 그 언니는 “돈 보낼 곳이 있는데 갑자기 폰뱅킹이 안 된다”면서 “대신 돈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자신의 통장에 약 100여만원의 잔액이 있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큰돈이 아니면 보내주겠다”라고 하자, 그 언니는 다른 사람 명의의 계좌번호를 알려주면서 “이 계좌로 70만원을 보내 달라, 오늘 안으로 꼭 갚겠다”고 해 아무런 의심없이 알려준 계좌로 7
그밖에 어린이잡지에 실렸던 만화들로는 , , 등이 있었다. 이 만화들 역시 일본만화였지만, 김우영, 이두호 같은 한국만화가들의 이름으로 실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이 우리나라 만화인줄 알았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만화를 가져다가 우리나라 만화가들이 베껴 그리고 각색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따라서 만화의 내용은 똑같지만 그림의 스타일은 원작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이 세 만화들은 어린이잡지에 실렸을 뿐만 아니라 TV의 만화영화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시절엔 TV가 아주
처음은 위안부 관련 동영상을 보고 ‘관심’이였습니다. 그러한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고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단 것에서 분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그 분노가 어쩌면 저를 ‘예산군평화나비단’ 단장이라는 곳까지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단장을 맡아 처음 하는 아주 중요한 행사라 떨리기도 하고 실수하면 어쩌나 하며, 설레임 반 걱정 반으로 소녀상 1주년 기념식 및 세월호 4주기 추모식 행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임원 모두 평화나비단에 속해있는 ‘참길’ 학생동아리가 주축이 되어 연합학생회와 함께 세월호 및 위안부 관련 내용을
내가 만화를 처음 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 때인 1970년대 초였던 것 같다. 그때 아이들은 동네 만화방에 가서 몇 십 원을 내고 만화책을 보았다. 나는 만화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주인아저씨 몰래 으레 정해진 권수보다 더 많이 보곤 했는데, 그런 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고, 주인아저씨도 알면서 눈감아주었을 것이다. 그때 본 것들 중에는 임창의 란 만화가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또 엄희자의 순정만화들도 있었다. 뽀뽀라는 소녀가 역경을 딛고 패션디자이너로 성공하는 이야기인
내가 어릴 때 살던 향천리는 시골의 읍 소재지에 있는 동네로 주변에 논밭이 많았다. 우리 집은 야트막한 산 밑에 있었는데 대문 앞으로 좁은 길이 쭉 내리뻗어 있고 좌우에는 다른 집들이 몇 채씩 있었다. 우리 집의 왼쪽에는 기와집이 두 채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교인들은 일요일 뿐 만 아니라 주중의 새벽이나 밤에도 예배를 드리는 모양이었다. 나야 밤이면 곤히 자느라고 몰랐지만, 언젠가 우리 집에 다니러온 친척 아저씨 한 분이 새벽에 찬송가 소리에 시끄러워 잠이 깨었다고 불평을 했다. 크리스마스 때면 교회에 다니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