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줄기 서원산을 끼고 운산 마애삼존불 방향으로 가다, 증설된 봉림저수지 옆에 정대영 가옥 표지판을 따라 5분여를 더 가면 ㅡ자형 기와지붕의 가옥을 만날 수 있다. 정대영 가옥이다. 전면에 연못이 있으며 서원산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넉넉하다.이 가옥은 정대영의 조부 정홍모가 1926년께 지었다고 전해진다. 건축 당시에는 ㄱ자 집이었으나 남향 부분은 헐렸고 현재는 팔작 기와지붕의 ㅡ자형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대문부터 부엌, 방 2칸, 대청, 건넌방의 순서이고 높은 마루가 놓여 있다.이 가옥은 조선 말기의 건축물로 충남
덕산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나 있는 622번 도로를 따라 10km 정도 가면 낙상리 입구 초입에 쌍효각이 서 있다.이 정려는 지극한 효행으로 부모를 극진히 섬겨 주변을 감동시킨 인원영과 성주배씨 부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27년 명정을 받아 세워진 것이다. 정려가 자리한 덕산 낙상리 검마내는 일찍부터 교동인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던 곳으로, 조선초기 인물인 인삼석이 입향조로 교동인씨 덕산파 시조가 된다.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것이 특별한 일이 돼 버린 현 세태에 효자 정려를 돌아 보고 효에 대한 생각을 되짚어 봄도 보람된 일이
예로부터 덕숭산 자락에서 덕을 숭상하고 사람들이 풍요롭게 산다해 덕풍(德豊)이라 불린 이곳에 고려 17대 왕 인종이 가루실마을(둔리)의 덕망 인사 존술을 호장으로 임명하고 덕풍이씨라는 성을 하사했다.그 후 명종때 무신의 발호로 민심이 흉흉해 공주 명학소의 난이 일어나, 곡창지대인 예산을 유린하고 예산현감을 살해한 뒤 가야사를 점령했다.이를 평정키 위해 이부 대장군이 출동한 바, 덕풍호장의 아들 언후도 의병장으로 참여해 공을 세움에 검교대장군에 임명 왕실호위를 담당, 그 일족은 수도 개경으로 이주해 번성했다.조선 세종때 3판서 2참판
고려 삼은 중 한 사람인 목은 이색, 고려 말 대학자이며 충신이다. 관은 한산, 호는 목은이다.예산에서 덕산으로 가다 보면 내포신도시 방향으로 삽교2리 마을이 나온다. 수촌삼거리에서 목은영당을 알리는 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갔지만 입구를 주민에게 물어야 했다.영정을 봉안한 영당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역사의 흔적을 알리고 있다. 솟을삼문이 있고 문충문(文忠門)이라는 현판이 있으며, 영당건물에는 목은선생영당(牧隱先生影堂)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그러면 삽교에는 언제 영당이 선 겄일까? 1592년 임진병란 때 목은의 7대
덕산에서 내포신도시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세심천온천호텔이 있다. 주차장을 끼고 등산로를 10여분 오르다 보면 너른 삽교평야를 내려다 보는 거대한 보살입상을 볼 수 있다.보물 제508호인 ‘예산삽교읍석조보살입상’이다. 수암산자락에 보물로 지정된 보살입상이 있음을 아는 이는 그리 흔치 않다. 거대한 돌 두 덩어리를 이어 붙여 조성한 특이한 형태로 육각형의 보관을 쓰고 네모난 얼굴은 소박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고려시대 지방화 된 대표적 불상으로 그 높이가 549cm에 이른다.수암산은 예로부터 기우제를 올리던 영험한 산으로, 그 곳에 불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