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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密陽朴氏) 봉례공파(奉禮公派)- 응봉면 주령리 <곽호제 교수와 함께하는 예산의 성씨>
  •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yes@yesm.kr
  • 승인 2020.07.2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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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박혁거세부터 54세 박조(朴藻)까지는 「密陽朴氏 華麓公派-대술면 화천리」(5월 25일자)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중복을 피해 이번에는 생략한다.

 

응봉면 주령리는 밀양박씨 봉례공파(奉禮公派)의 집성촌이자, 선영(先塋)이 조성된 마을이다. 봉례공파로 구분하기 이전에 55세 박충원(朴忠元, 1507~1581, 호:駱村)의 후손들이 ‘낙촌공파(駱村公派)’로 구분하고, 56세 박호현(朴好賢, 1550~1581, 호:華麓)의 후손들이 ‘화록공파(華麓公派)’로 구분하였는데, 모두 호를 파명으로 사용하였다.

박호현의 세 아들(安節·安禮·安行) 중 둘째 박안례(朴安禮)가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으므로 후손들이 ‘양목공파(楊牧公派)’로 구분하며, 증손 박길석(朴吉錫)이 대술면 화천리에 입향하여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셋째 박안행(朴安行, 1578~1656, 호:石谷, 관:通禮院奉禮)의 후손들은 관직명을 따서 ‘봉례공파(奉禮公派)’로 구분하며, 이미 박안행 때에 응봉면과 신암면 지역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응봉면 송석리 출생으로 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묘비문에 “그의 묘는 본래 대흥(大興)에 있었으나 후에 예산 왕자지동(王子池洞, 현재 신암면 용궁리 산82-1)으로 옮겼다”라고 하였고, 360여년 된 소나무 아래에 조성되어 있다. 박안행은 손자 박신주(朴新胄)의 공적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박안행의 두 아들 박승휴(朴承休, 1606~1659, 자:子美, 관:司憲府執義)와 박승건(朴承健, 1609~1667, 호:星隱, 관:宗簿寺正) 형제는 1630년 사마시와 1650년 문과에 이어서 함께 합격하였다. 박승휴는 1635년(인조 13) 성균관 유생일 때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고,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있을 때 부친 병환이 위독해지자 한겨울에 죽순(竹筍)을 구해 달여 드리고 얼음을 깨 잉어를 잡아 끓여 드렸으며, 차도가 없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는 효행을 보였다고 한다. 1689년(숙종 15) 효자 정려(旌閭)를 내렸고, 현재 광시면 예당로 413[신대리 413]에 정려가 있다. 그의 묘는 본래 보령시 천북면 사정리에 있었으나, 1989년 응봉면 주령리로 이장하였다.

박승휴는 아들 여섯[新冑·文冑·聖冑·來冑·相冑·最冑]을 두었는데, 특히 장자 59세 박신주(朴新胄, 1624~1692, 관:兵使, 副摠管)의 후손들이 번성하였고 관직에도 다수 진출하였다. 박승휴의 후손들은 대체로 응봉, 광시, 대흥, 신양 일대에 묘소를 조성하여 예산군 지역에 세거하였으나 후손의 일부가 보령, 홍성, 청양, 부여, 면천, 아산, 여산 등지로 이주하였다.

박승건은 세 아들[東冑·之冑·世冑]을 두었는데, 장자 박동주(朴東冑, 1628~1689, 靑陽縣監)의 후손들은 대체로 예산 지역에서 세거하였으나, 둘째 박지주(朴之冑, 1630~1661)와 셋째 박세주(朴世冑, 1641~1725)의 후손들은 임천, 보령, 홍산 등지로 많이 옮겨갔다.

밀양박씨 봉례공파(예산 지역 중심) 65세 ‘진(鎭)’자 항렬까지의 특징을 몇 가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밀양박씨 봉례공파는 60세 ‘석(錫)’자 이후에 크게 번성하였고, 무과를 통해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밀양박씨화록공파보』(1954년)를 통해 57세 박안행부터 65세 ‘진(鎭)’자 항렬까지 관직 진출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43명 중 무과 합격자가 23명(53%), 사마시(司馬試) 합격자가 12명(28%)이었다. 이를 보면, 밀양박씨 봉례공파는 무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62세 ‘종(宗)’자부터 65세까지 4세 동안 20명의 무과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둘째, 밀양박씨 봉례공파는 유력 가문과의 교유(交遊)와 혼인관계가 형성되었다. 조선후기 최고의 정치가이자 성리학자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본관:恩津)과 2살 차이인 박승건이 교유관계를 형성하였고, 송시열은 박안행과 박승휴·박승건 3인의 묘비문을 지었다. 또한 송시열은 박승건의 셋째 아들 박세주(朴世冑)의 호를 ‘정수당(靜水堂)’이라고 글로 써서 주었다. 박승건은 송시열의 손자 송은석(宋殷錫)을 사위로 맞았으며, 동춘당 송준길의 현손 송태현(宋台鉉)을 손서(孫壻)로 맞았다.

또한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덕산(德山)에 살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 본관:坡平)는 박동주(朴東冑)의 손서(孫壻)가 되었고, 윤봉구는 장인 박성석(朴星錫, 1650~1709)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셋째, 여러 대에 걸쳐 효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1689년(숙종 15, 保寧市誌에는 1706년(숙종 32)) 박승휴와 박승건 형제에게 효자 정려를 내렸으며, 1729년(영조 5)에는 박세주에게도 효자 정려를 내렸다. 박승건과 박세주 부자의 정려는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박안행·한양조씨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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