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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密陽朴氏) 송월당공파(松月堂公派)- 대술면 농리 <곽호제 교수와 함께하는 예산의 성씨>
  •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yes@yesm.kr
  • 승인 2020.06.2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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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박혁거세부터 52세 박미(朴楣)까지 밀양박씨 선대의 내력은 지난 글(「밀양박씨 화록공파-대술면 화천리」)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중복을 피해 이번에는 생략한다.

예산군 대술면 농리는 약 350여년 전인 17세기 중엽에 밀양박씨 송월당공파가 입향하여 현재까지 세거해온 집성촌이다.

‘농리(農里)’와 유사한 지명으로 ‘농소(農所)’, ‘농소리(農所里)’, ‘농소면(農所面)’ 등이 전국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농소(農所)’로 가장 많이 표현되었는데, 그 뜻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세력가들이나 사찰에서 사사(私事)로이 소유하던 큰 농지(農地)’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역이 행정단위[里, 面]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이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에는 ‘국농소(國農所)’로 표현되어 국가 또는 왕족과 관련된 자료도 종종 발견된다.

 

대술면 농리도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농술리(農述里)’로 쓰여져 있고, 영조부터 헌종까지 걸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고종 때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농소리(農所里)’로 기록되었다. 농리에는 현재 ‘농소(農所)’라고 불려지는 곳이 있으나, 역사적 자료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이다.

대술면에 밀양박씨 집성촌은 두 곳이 있는데, 지난 35호에 게재된 화천리(華麓公派)와 농리(松月堂公派)이다. 두 집성촌의 분파(分派)는 500여년 전인 1500년대 중엽에 9세[糾正公 朴鉉으로부터] 박광영(朴光榮, 1463~1537, 자:君實, 묘:豆應村)의 아들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박광영은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2등, 1498년(연산 4) 문과에 급제하여 1504년(연산 10)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이때 연산군이 생모 폐비윤씨(廢妃尹氏)를 추숭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여, 목천(木川, [『연산군일기』 10년 4월 7일. 묘갈명·족보에는 靈光 유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그후 내외(內外)의 많은 관직을 거쳐 1534년(중종 29)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그에 대한 평가로 “성품이 단정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였다.”라고 전한다.

박광영의 장자 박조(朴藻, 1482~1521)의 장자 박충원(朴忠元, 1507~1581, 호:駱村·靜觀齋)의 후손들이 ‘낙촌공파(駱村公派)’로, 다시 박충원의 4남 박호현(朴好賢, 1550~1581, 호:華麓)의 후손들이 ‘화록공파(華麓公派)’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박광영의 4자 박이(朴苡, ?~1563, 자:苡之)의 장자 11세 박호원(朴好元, 1527~1584, 자:善初, 호:松月堂)의 후손들이 ‘송월당공파(松月堂公派)’로 구분하였다. 위의 파명(派名)이 모두 호(號)를 이용하였다.

박정현 일기 국보지정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념비.

박호원의 4자 12세 박정현(朴鼎賢, 1562~1637, 호:義谷)은 알성문과(謁聖文科) 급제 후 형조판서(刑曹判書)까지 올랐다. 그는 매일 국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일기에 기록하였다. 1744년(영조 20)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중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1623년부터 1638년까지 1,087건의 역사적 사실을 그가 기록한 일기를 옮겨 복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기 부분을 ‘「박정현일기(朴鼎賢日記)」’라고 명시하였다. 1999년 4월 9일 그의 일기 등 초책원본(草冊原本)이 국보[303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4년 농리 마을회관 앞에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비문은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金鎭佑)가 지었다.

밀양박씨 송월당공파의 농리 입향조는 박정현의 차자 13세 박안제(朴安悌, 1590~1663, 호:義村)이다. 박안제는 1612년(광해 4) 사마시에 합격하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이에 항소(抗疏)하였다. 162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제수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의 농간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해미현감으로 발탁된 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올라 재직 중 죽었다. 그의 묘소가 대술면 농리에 처음으로 조성된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의촌 박안제·정부인 동래정씨 묘 및 묘비 전면.

박안제의 장자 14세 박승겸(朴承謙, 1611~1639, 자:子益, 贈執義)의 외아들 15세 박세웅(朴世雄, 1636~1706, 호:遜村, 正郎)의 후손들이 대술면 농리에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다. 박안제의 차자 박승준(朴承俊)은 백부 박안효(朴安孝)의 계자(繼子)가 되었고, 3자 박승옥(朴承玉)은 병자호란 때 영남(嶺南)으로 피난했다가 후손들이 진주(晉州)에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박세웅의 세 아들[16세 尙采·尙彬·尙晳]과 그들의 아들들인 17세 경자(經字) 항렬 14명의 묘소가 모두 농리에 있다. 그러나 17세의 장자는 거의 농리에서 세거하고 있지만, 나머지는 점차 농리에서 타지로 이주하는 현상을 찾을 수 있다.

장자 박상채(朴尙采)의 외아들 박경은(朴經殷, 생부:朴尙彬)의 후손 일부가 현재 대술면 농리와 마전리, 그리고 신양면 죽천리에 세거하고 있다. 차자 박상빈(朴尙彬)의 아들 8명(朴經殷 제외, 經夏·經周·經漢·經晉·經明·經學·經福·經祿) 중 장자 박경하(朴經夏)의 후손들이 대부분 농리에 세거하고 있고, 3자 박경한(朴經漢)의 후손 일부가 대흥면과 홍성군 금마면으로 옮겨갔다. 박상석(朴尙晳)의 아들 5명[經朝·經天·經文·經義·經運] 중 장자 박경조(朴經朝)와 차자 박경천(朴經天)의 장손들이 농리에 근거지를 두고 있고, 박경천의 후손 일부가 대흥면으로 옮겨갔으며, 그리고 5자 박경운(朴經運)의 후손 일부가 오가면에 세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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