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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茗禪) ③<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 사이>
  • 노재준 <서예가, 예산고 교사>  yes@yesm.kr
  • 승인 2020.02.1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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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추사 글씨<명선(茗禪)>.
(도2)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에서 집자한 <명선>.

<명선(茗禪)>(도1)의 관지에서 ‘白石神君碑意(백석신군비의)’에 대해 살펴 본다. 백석신군비의 뜻을 살려 썼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차의 세계》 9월호에서는 <명선>을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에서 집자해(도2) 추사의 글씨라고 했다. 중국 허베이성 천불동 한비당(漢碑堂)에서 찾아냈다며 <명선>이 진품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신문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추사의 서학(書學)

이를 강우방 선생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이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그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필자는 그 둘을 비교해봤다. 비석 글씨는 파임이 분명하고 획에 굴곡이 있으며 끝의 삐침이 뚜렷했다. 획의 처음과 끝이 중요한데, 간송미술관 소장의 ‘명선’은 모두 어중간하다. 획이 뻣뻣하고 생명감이 없으며 구성이 허해 짜임새가 없다. 두 글씨의 구(口)자만 비교해도 ‘백석신군비’에선 왼쪽 세로내림이 한결같이 곡선으로 휘어 있고 오른쪽 세로내림은 힘차면서 뚜렷하지만, ‘명선’에선 왼쪽 세로내림이 모두 직선이고 오른쪽 세로내림은 힘없이 희미하다. 추사는 유독 한(漢)나라 예서(隸書)를 좋아해 임서(臨書·원서를 옆에 두고 그대로 따라 쓰는 것)를 즐겨 했는데, 이렇게 전혀 다르게 써놓고 필의를 따랐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도3) <오봉이년각석>을 임서한 글씨.

《차의 세계》에서 백석신군비에서 집자해 보여준 <명선>으로 추사의 글씨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무리다. 추사의 <명선>과 집자한 글씨가 확연히 다르거니와 이러한 모습은 어느 한예(漢隷)에서 집자하더라도 나올 수 있다. 추사의 글씨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도4) <오봉이년각석>원탁.

그렇다고 해서 이에 대해 반박한 강우방 선생의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강우방 선생은 백석신군비의 필의를 따랐으면 추사의 <명선>은 이처럼 모양이 전혀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추사는 원탁을 그대로 쓰는 것을 즐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사의 금석문에 대한 공부 과정을 보면 물론 원탁에 가깝게 임모한 경우가 있다. <오봉이년각석(五鳳二年刻石)>을 임서한 글씨(도3)가 그 예다. <오봉이년각석> 원탁(도4)과 비교해 보면, 장법은 물론 자형까지 핍진하게 임모하고 있다.

 

(도5) <곽유도비>를 임서한 글씨.
(도6) <곽유도비>원탁.

하지만 <오봉이년각석>과 같이 그대로 임모한 예보다 추사 자신의 글씨로 쓴 예가 더 많다. 현재 전하는 <곽유도비(郭有道碑)>를 임서한 글씨(도5)를 보겠다. <곽유도비> 원탁(도6)과 완전히 다르다. 추사 자신의 글씨로 쓰고 있다. 참고로 이 <곽유도비>를 임서한 글씨는 추사의 분명한 글씨다. <한경명(漢鏡銘)>, <안족등명(?足?銘>을 임모한 글씨도 보면 그대로 쓰지 않았다. 추사는 수많은 금석문을 접하면서 임모(臨摹)하고 독첩(讀帖)을 한 것은 당연하다. 임모와 독첩은 서학의 필수이기 때문이다. 추사는 자신의 주관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백석신군비의'의 의미
(白石神君碑意)

추사의 유명한 난초 그림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보자. 이 그림의 화제 중 ‘以草隸奇字之法爲之(초서와 예서, 기자의 법으로 그렸다)’는 명대의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화론이다. 《화안(畵眼)》에서 전출된 것이다. 추사에게 영향을 준 동기창은 중국의 서예를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陳人尙韻 唐人尙法 宋人尙意(진인들은 운을 숭상하였고 당인들은 법을 숭상하였으며, 송인들은 의를 숭상하였다.)”

여기서 ‘宋人尙意’의 ‘意(의)’는 무엇일까? 법(法)보다는 개성과 창신(創新)에 중점을 두는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명선>의 관지에 쓰인 ‘白石神君碑意(백석신군비의)’를 이해해야 한다. <명선>의 글씨 모양이 백석신군비와 다르니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강우방 선생의 주장은 추사의 서학 과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말이다.

여기서 백석신군비의 뜻을 썼다는 것은 백석신군비의 자형을 살려 썼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서체의 자형은 일반적으로 세로보다는 가로가 긴 형태이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도 있다. 한예(漢隷) 중 이 백석신군비가 그렇다. <명선>은 이런 백석신군비의 뜻을 살려 썼다. 앞에서 고증한 바 있듯이 성락원의 <장외가(檣外家)>도 백석신군비의 자형으로 쓴 것이다.

여기에서 반대로 생각해 보자. 이 <명선>이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면, 위작을 만든 사람은 백석신군비의 원탁에 가깝게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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