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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을 나온 카메라<심 신부의 예산살이, 낡음에서 빛을 보다>
  • 심규용 <예산성공회>  yes@yesm.kr
  • 승인 2020.02.1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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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입춘이던가. 예산의 겨울 하늘은 하얀 눈물 한 움큼도 인색한 채 끝나버렸다. 누군가의 콧김마저 코로나일지 모른다며 예민해진 이때, 마냥 방구석에서 유튜브 좀비 시리즈들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장롱을 뒤져 꺼낸 20년도 더 된 카메라, 몸은 나이를 먹었건만 기억은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 퍼뜩 든 생각, 신부의 상상은 현실이 될까?

상상의 출발은 늘 가까이 있는 법, 성당 가까운 옛 군청 거리에 디자인 가게가 있다. 가게 명 ‘디자인 밥’. 간판 없이 창문에 소박하게 붙인 시트지에 그렇게 쓰여 있다. 디자인에서 쌀이 나오고 고기가 나오고 콩나물이 나오니 디자인이 밥인 게지. “밀거나 당기거나”, 대문에는 살짝 고민하게 만드는 문 여는 방법까지 친절히 써 놨다.

주인장은 밥님. 작년부터 성당의 크고 작은 행사 포스터를 후원해주는 고마운 분이다. 그의 취미 중 하나가 흑백사진, 자가 현상과 인화까지 하는 소위 은둔 고수다. 필름은 생산을 멈췄고 현상소도 옛말이 된 시대, 흑백필름은 그 고유한 영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여전히 필름으로 사진을 하고 있는 그를 보니 무려 이산가족상봉 느낌? 장롱을 나온 내 카메라도 밥님 카메라와 인사한다. 카메라 나이를 합치니 무려 여든 살. 사람도 카메라도 가히 역전의 용사들이다.

 

상상의 꿍꿍이는 이렇다. 기왕 찍는 필름, 흑백사진 모임을 만들어보자는 것. “핸폰으로도 사진을 찍는 시대에 뭔 필름카메라여~” 이 가당찮은 생각은 의외로 참신하다. 낡은 것에 애착을 갖는 고운 심성을 지닌 이들과 흑백 현상과 인화를 배워보자. 사진의 백미는 결국은 흑백에 있다. 어지간한 사진쟁이들은 다 안다. 읍내에서 시작해 군내의 오래된 건물과 마을을 흑백으로 기록하여 전시하는 프로젝트! 워떠유 이 상상력? 따라서 장롱 속 카메라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노라.

연말에 가수 양준일 열풍으로 시작된 90년대가 다시 소환되었다. 레트로를 넘어 이제 뉴트로의 시대란다. 필름이 센서로 대치되고 쉽게 찍고 지우는 디지털 시대, 0과 1이 아닌 살과 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은 여전히 아날로그로 작동한다. 땀과 정성의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는 법, 한 컷 한 컷의 굼뜬 행위가 소중해진 시대다. 효율이 언제 우리를 구원했던가?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서 잠시 멈춰 지나온 길을 더듬어야 할 일이다. 슬로시티는 절대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모 카메라 회사의 광고 카피였다. 이 카피가 워낙 유명해 카메라를 많이도 팔아먹었다더라.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태어났던 집, 뛰어놀던 골목길, 학교와 병원, 교회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 기억은 이미지를 통해 재생된다. 100년 넘게 버텨온 우리 성당과 유치원도 사라질 뻔 했는데 예산의 근대 건축물도 몇 개 남지 않았다. 더 헐리기 전 고운 흑백 사진으로 남겨 보자꾸나.

 

“소소한 월급을 아껴 암실 용품도 마련해야지. 부지런히 걸어 다니면 아마 배도 훌쭉 해질 꺼야.” 찍기도 전에 걸린 장비병과 근거 없는 희망을 뇌까려보는 경자년 입춘 날이다. 올 해 읍내 어딘가 촌 빨 가득 날리며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서성대는 사람 있다면 그게 나일게다. 장롱을 나온 카메라의 먼지를 털며 귀를 대어본다. 그리고 카메라가 내게 말을 건넸다.

스르륵 철컥 스르륵 철컥
나를 잠시 잊었나요
긴 잠을 잤네요
한때는 세상 구경 실컷 했지요
첫 아가의 맑은 눈동자와
맑은 하늘 푸른 바다와 멋진 산들도 보았어요
깊게 패인 농부의 시름도 담았고
호랑이 사모님의 수줍은 미소도 기억하지요
누군들 봄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요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청춘이었죠
이젠 몸뚱이엔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고 
반짝이던 렌즈도 빛이 바랬네요
이제 보니 당신도 나이를 먹었군요
파인더를 응시하던 눈도 침침해지고
셔터를 누르던 손에도 세월이 앉아있네요
나와 함께 다시 빛과 어둠을 담아볼까요
함께 남겨진 시간들을 오래도록 새겨보아요 
다시 울리는 추억의 소리
스르륵 철컥 스르륵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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