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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가(檣外家) ①<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 사이>
  • 노재준 <서예가, 예산고 교사>  yes@yesm.kr
  • 승인 2019.10.0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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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번 달 《월간 서예문인화》 잡지 10월호에 실린 「성락원의 암각 글씨 <장외가(檣外家)>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의 글을 좀 흔들어 몇 번에 나누어 싣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최근에 추사 글씨로 시끄럽다. 중국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서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전』이라는 주제로 열린 전시에 나들이를 한 <계산무진(谿山無盡)>과 <명선(茗禪)>이 그렇고, 서울 성북동에 있는 정원 ‘성락원(城樂園)’의 바위에 새겨 있는 추사 글씨가 그렇다. <계산무진>과 <명선>은 모두 그간 추사의 명작으로 알고 있는데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진품으로 세탁하기 위해 중국전에 출품한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는 험악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 두 글씨는 분명한 추사의 글씨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성락원의 추사 글씨

최근에 공개된 정원 성락원의 문화재의 자격 여부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데, 이 성락원에는 많은 암각 글씨가 있다. 이중 추사 글씨에 대해서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각기 다르다. 이 글씨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겠다.

이 추사 글씨에 대해서는 올해 정원이 공개되기 전부터 누리그물에서 건져 올려 알고 있던 글씨다. 언젠가는 이 연재에서 다룰 예정이었다. 하지만 온전하게 보이는 글씨가 아니라 덩굴에 가려진 암각 글씨 사진이다. 사진은 빛이 만들어주는 명암의 미묘한 낌새를 순간 포착한 것이다. 그렇기에 빛에 의해 정확한 모습을 포착하기 어려울 수 있다. 금석문을 사진보다는 탁본으로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는 이유다. 최근 경향신문에 이 글씨의 탁본이 처음 공개되면서 온전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도1) 〈장외가〉 탁본 글씨 .

《월간 서예문인화》 9월호에서는 추사의 이 탁본 글씨(도1)를 표지로 장식했다. 그리고 맨 뒷부분에서 설명을 곁들였다. 설명은 경향신문의 기사를 정리하여 실었다. 그 부분을 그대로 싣는다.

“특히 김정희(1786~1856)의 또 다른 호인 ‘완당’과 함께 새겨진 ‘장빙가(檣氷家) : 고드름을 뜻함)’ 바위 글씨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전형적인 추사체는 아니지만 유배(1840년) 이전의 추사 글씨일 가능성은 있다.”며 최종 판단을 유보했고, 손환일 대전대 서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 글씨는 추사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부정했다. 또한 글씨도 ‘장빙가’가 아니라 ‘장외가(檣外家 : 담장 밖 집)’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직획 위주의 고예(전한 시기의 서체·전서보다 간략하고 해서에 가까운 한자 서체) 스타일 글자 구조로 바위에 새겨진 추사체”라고 보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잘 간추려 담고 있다. 이 글을 바탕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살펴본다. 우선 이 암각 글씨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외가(檣外家)’로 읽어야

결론부터 내리면 ‘장외가(檣外家)’로 읽어야 한다. 최근에 공개된 탁본을 보면 확실하다. ‘氷(빙)’ 자가 아니라 ‘外(외)’ 자이다. 지금까지 ‘장빙가(檣氷家)’로 읽어 왔다. 이 글씨에 대해 1992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사적으로 지정하기에 앞서 조사한 보고서에는 ‘춘영상(椿永象)’으로 읽었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장빙가’로 읽었다. 그리고는 ‘고드름이 열린 집’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왔다. 왜 ‘氷(빙)’ 자나 ‘永(영)’가 아니고 ‘外(외)’ 자인가를 살펴보자.

(도2) ‘外(외)’ 자를 쓴 순서.

먼저 쓰는 순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림(도2)과 같은 순서로 썼다. ‘氷(빙)’ 자나 ‘永(영)’ 자를 쓰는 순서와는 다르다. 왼쪽의 ‘夕(석)’ 자는 모두 3획이다. 하지만 필획을 잘 살펴보면 네 번에 걸쳐 썼다. ‘夕(석)’ 자의 ③번 획을 반대 방향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다. 이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外(외)’ 자로 읽는데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이렇게 쓴 한예(漢隷)의 글씨가 ‘外(외)’ 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外(외)’ 자는 일반적으로 쓰는 것과 다르게 썼다. ‘卜(복)’ 자 세로획 끝을 오른쪽으로 올려 처리하고 ‘탁(啄, 짧게 삐친 획)이 추가된 형태다. 이러한 예는 한(漢) 대의 예서 ‘사신비(史晨碑)’와 ‘서협송(西狹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은 모두 명비다. 추사는 당시 이 ‘사신비’과 ‘서협송’을 알고 있었을까?

《완당전집》 제7권에는 ‘서시우아(書示佑兒)’라는 추사의 글이 실려 있다. 추사의 서학 과정을 살펴보기에 좋은 글이다. 특히 여러 서체 중 예서(隷書)에서 그렇다. 관련 부분을 본다.

“예서(隷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아니 된다. 그 법은 반드시 방경(方勁)과 고졸(古拙)을 상(上)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졸한 곳은 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예(漢隷)의 묘는 오로지 졸한 곳에 있다. 사신비(史晨碑)는 진실로 좋으며 이 밖에도 예기(禮器)ㆍ공화(孔和)ㆍ공주(孔宙) 등의 비가 있다. 그러나 촉도(蜀道)의 여러 각이 심히 고아(古雅)하니 반드시 먼저 이로 들어가야만 속예(俗隷)ㆍ범분(凡分)의 이태(膩態)와 시기(市氣)가 없어질 수 있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 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청고 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완하(腕下)와 지두(指頭)에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장본(張本)이며, 예를 쓰는 신결(神訣)이 된다. 근일에는 조지사(曹知事), 유기원(兪綺園 유한지(兪漢芝)) 같은 제공(諸公)이 예법에 깊으나 다만 문자기(文字氣)가 적은 것이 한스러운 것이다. 이원령(李元靈)은 예법이나 화법이 다 문자기가 있으니 시험 삼아 이를 살펴보면 그 문자기가 있는 것을 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 해야 할 것이다. 집에 수장된 예첩은 자못 구비해 있다. 서협송(西狹頌) 같은 것은 촉도 제각(諸刻)의 극히 좋은 것이다.”

(도4) 서협송의 ‘外(외)’ 자.
(도3) 사신비의 ‘外(외)’ 자.

추사가 서자인 수산(須山) 김상우(金商佑, 1817~1884)에게 써준 글이다. 이 글에서 추사는 예서를 특별히 강조하고 한예에서 ‘사신비’과 ‘서협송’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사는 특별히 예서체에서 많은 명작을 남겼는데, 이러한 예술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사신비’과 ‘서협송’을 깊게 궁구한 추사는 ‘사신비’의 ‘外(외)’ 자(도3)와 ‘서협송’의 ‘外(외)’ 자(도4)의 형태를 머릿속에 정확하게 저장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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