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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매헌(梅軒)의 시간을 생각한다
  • 강희권 <더불어민주당 예산홍성지역위원장>  yes@yesm.kr
  • 승인 2019.04.2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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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누구나 삶의 기준이 될만한 인물이 한 사람쯤 있게 마련이다. 내게는 매헌 윤봉길 의사가 그런 분이다. 생가가 지척이라 어릴 적부터 익숙한 덕도 있겠다. 하지만 세상에 나가 참담한 현실 앞에서 갈등할 때, 문약한 내 성정을 일깨워서 불의한 정권에 돌 하나 들고 맞설 수 있었던 데는 매헌의 행동주의가 크게 한몫했다고 본다.

나에게 매헌은 사상이나 말보다는 그가 보여준 행동들로 더 마음에 들어오는 인물이다. 말의 맥락이 아닌 행동의 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죽을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을 처음 만난 윤봉길은 말했다. 조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시간을 쪼개가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다. 스물다섯 살, 매헌의 시간을 생각한다. 매헌은 왜 그 창창한 젊음을 조국 독립에 던져야만 했을까.

1930년대 초반 독립운동은 국내외로 사면초가였다. 국내로는 일제의 문화통치로 친일 부역자들이 급증하고, 해외로는 무력항쟁의 기세가 꺾이고 상하이 임시정부까지 유명무실해지는 등 지리멸렬 상태였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매헌에게 상해로 가는 일은 ‘여러 말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일왕 투폭 쾌거로 되살아난 항일의 불씨를 더 키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불쏘시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시대는 매헌을 요구했다. 그는 기꺼이 항일의 불쏘시개가 된다.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이 태도의 차이가 매헌을 매헌이게끔 했다. 이 실천의 차이가 항일 무장투쟁의 불길을 극적으로 되살려냈고, 임시정부가 중국 정부와 항일연합전선을 펼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매헌을 생각할 때마다 가신 나이의 곱절을 넘겨 사는 내 처지를 되짚어본다. 그만큼 초심을 지키는가. 그만큼 실천하는가. 거대한 산 앞에 놓인 작은 돌덩이처럼 초라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윤봉길의 시간을 생각한다.

4월 29일 거사일 아침, 윤 의사는 세배나 비싼 새 회중시계를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와 맞바꾼다. “제게는 한 시간밖에 소용없으니 시계를 바꿉시다.” 자신에게는 거사 순간까지의 시간만이 중요할 뿐 나머지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세속적 가치에 초연했던 매헌의 태도는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런데, ‘빈 무덤’이라니. 자신의 주검이 제대로 수습되지 못할 것마저도 각오했던가. 실제로 매헌의 유해는 가나자와의 한 도로에 암매장된 채 13년 동안 일인들의 발에 밟히다가 해방 1년 뒤에야 조국으로 돌아왔다.

윤봉길은 짧은 삶을 살았으나 그 시간을 애국애족이라는 이타(利他)의 용광로에 완전 연소시킴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을 살게 되었다. 세간의 시간은 바람 속의 먼지처럼 가벼우나 역사의 시간은 그 이름 석 자와 함께 영생의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이 봄에도 여전히 스물다섯 살, 영원한 청년 윤봉길은 충의사 진한 매화 향기와 함께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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