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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좌산거(靑左山居) ③<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 사이>
  • 노재준 <서예가, 예산고 교사>  yes@yesm.kr
  • 승인 2019.02.1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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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수당기념관에 걸려있는 〈청좌산거〉 편액 글씨.

앞에서 ‘이로(怡老)’라는 호는 권돈인의 호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했다. 이 <청좌산거(靑左山居)>(도1) 글씨가 추사의 글씨라면 ‘이로’는 당연히 추사의 호이어야 한다. 현재 ‘이로’가 추사의 호로 거론된 바는 없다. 추사의 생질서(甥姪壻, 누이의 사위)로 제자인 조면호(趙冕鎬, 1803~1887)가 ‘옥수(玉垂)’란 호를 썼지만 ‘이당(怡堂)’도 썼다. 연결지어 볼 수도 있겠지만 조면호가 노년에 ‘이로’라고 쓴 예는 없다. 조면호는 글씨를 잘 썼다. 특히 자기 나름의 예서를 구사했다. <청좌산거> 글씨는 조면호와는 차이가 있고, 이런 글귀를 쓸 이유도 없다.


추사의 또 다른 호

(도2) 완원의 대련 글씨.

호를 쓰는 한자 문화권에서 추사처럼 많이 쓴 예는 없다. 추사가 이처럼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특히 사제의 연을 맺은 완원(阮元)의 영향을 받았다. 완원은 수십여 개의 호를 썼다. 완당은 완원에서 왔다. 추사가 사용한 ‘동해낭환(東海琅嬛)’, ‘우낭환선관(又琅嬛僊館)’은 완원의 호 ‘소낭환선관(小琅嬛僊館)’, ‘낭환선관(琅嬛僊館)’에서 따왔다.

완원의 대련 글씨(도2) 한 폭을 감상해 보자. 관지에 ‘이성노인(怡性老人)’이라는 호를 썼다. 이 ‘이로’와의 연관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추사의 호가 나오고 있다. 이 연재에서 새로 발굴한 호를 이야기한 바도 있다. ‘이로’라는 호도 그간 밝혀지지 않은 추사의 호로 볼 수 있겠다.

글씨를 살펴 본다. 간가결구(間架結構, 개개의 자획 간의 연결, 배합, 조합 형태와 여백의 배치를 포괄하는 말)와 필획 등을 분석해보면, <청좌산거>는 시기적으로 추사 이전에 나올 수 있는 글씨가 아니다. 추사를 기점으로 현대까지 본다면 이런 글씨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추사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수많은 비첩을 깊게 궁구하여 나온 글씨가 <청좌산거>이다.

 

(도3) 추사 글씨, 〈임한경명〉.

그래도 그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추사가 ‘한경명을 임서한 글씨[임한경명(臨漢鏡銘)]’(도3)에서다. 이 <임한경명>은 ‘한경명’을 그대로 따라 쓴 것이 아니라 추사 자신의 주관이 곁들여진 글씨다. 공교롭게도 ‘청(靑)’, ‘좌(左)’, ‘거(居)’ 자가 서로 겹쳐져 좋은 비교가 된다. <임한경명>보다 획을 더 두텁게 한 것이다. 윗부분을 무겁게 하고 아랫부분을 가볍게 한 ‘청(靑)’ 자는 자칫하면 어색하게 될 수도 있는데 잘 소화했다. ‘좌(左)’ 자에서 삐침의 시작 부분을 이렇게 꺾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4) 수당기념관에 걸려있는 〈홍엽산거〉 편액 글씨.

‘산(山)’ 자를 보자. 원래 글씨의 키가 작은 글자다. 그렇기에 밑의 공간에 여유가 있다. <계산무진(谿山無盡)>도 이런 예다. 눈에 띄는 것은 <청좌산거>의 ‘산(山)’ 자를 키 높이를 가능할 때까지 최대한 작게 썼다. 사실 이렇게 구사한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공교롭게도 서로 마주 보고 걸려있는 <홍엽산거(紅葉山居)>(도4)에서 볼 수 있다. ‘산(山)’ 자는 서로 다른 형태를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필법과 결구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청좌산거와 홍엽산거

글씨의 분간포백(分間布白)에 대한 말이 있다. “성긴 곳은 말이 달릴 정도로 하고 빽빽한 부분은 바람조차도 통하지 못하게 하라. 항상 여백을 생각하면서 운필과 결구를 하면 기묘한 맛이 나타나게 된다.[疏處可以走馬 密處而不透風 常以計白而當黑 奇趣卽出]” 추사보다 앞서면서 겹쳐지기도 한 청나라의 유명한 서예가 등석여(鄧石如)의 말이다. <청좌산거>와 <홍엽산거>는 이 말의 기가 막힌 예다. 획 사이의 공간을 보면, <청좌산거>는 바람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여서 숨 막힐 지경이다. 고난도의 글씨다. <홍엽산거>는 ‘엽(葉)’ 자와 ‘거(居)’를 보면 말도 달릴 정도로 시원하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추사다. 수당기념관 한 공간에서 탁월한 공간 구성의 결구를 한 두 작품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무슨 기묘한 인연인가?

추사가 권돈인에게 써 준 글씨로 전하는 것은 많다. 그만큼 전하지 않는 것도 더 많을 것이다. ‘기브앤테이크’라고 권돈인이 추사에게 써 준 글씨도 많아야 될까? 그건 전혀 아니다. 없는 것이 당연하다. 추사는 당시 붓으로 조선과 중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존재였다. 이런 추사에게 절친이더라도 하수인 권돈인이 글씨를 써 준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청좌산거>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 보았다. 권돈인의 글씨라는 근거는 아쉽게도 없다. 분명한 추사의 글씨다. 우리 역사에서 내용과 상황, 그리고 글씨로 볼 때<청좌산거>라는 글씨를 써서 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추사밖에 없다.

앞에서 권돈인의 글씨라면 추사를 위로해 주어도 모자랄 판에 추사를 약 올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추사가 <청좌산거>를 썼다면 달라진다. 언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66세의 연로한 나이에 또 다시 시작한 귀양살이는 추사에게는 나락으로 떨어진 깊은 절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히려 위안과 여유를 찾으려는 추사의 모습을 이 <청좌산거>에서 나는 조심스레 읽는다.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희망을 생각해 보며 ‘이로’라는 호도 새로 지어 썼을 테다.

   
 

이 <청좌산거> 글씨는 추사가 북청에 있을 때 태어났다. 함경도 북청에서 멀고 먼 추사의 고향 충청도 예산 땅까지는 물어물어 어떻게든 찾아왔다. 차마 추사가 묻힌 곳까지는 가지 못했다. 대신 가까운 곳 수당기념관에 안식처를 정했다. 인연이 없지는 않다. 추사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수당 선생의 외할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이었다. 그렇다면 <청좌산거>는 추사의 화신(化身)이 아닐까? 정비석의 글귀처럼, 암연히 수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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