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의 상해에서의 마지막 10일을 쓰기 위해 두 번째 상해로 갔을 때다. 4월에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6월에야 갔었다.누군가 중국 해방운동에 대한 미술 전시회가 있다 하니 가보면 작은 얻음이라도 있을지 모른다 하여 찾아가서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30년대 상해의 모습이나 독립운동에 관한 것이 있으면 아무리 작은 꼬투리라도 달려갔다.갤러리는 매우 적막했다. 커다란 갤러리에 오직 그림은 한 점만 있다. 대작이긴 하지만 벽체 한 면만을 장식한 채 다른 면은 캄캄했다.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그리로 이끌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홍구공원을 찾은 것은 상해를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매헌의 상해 일지를 다시 한 번 둘러보면서 상해 취재를 정리하기 위해서다. 오송항에서 화합방을 거쳐 홍구공원까지 매헌의 상해 1년을 다시 뒤돌아보았다.한 달 동안 내게도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뜻하지 않은 행운도 왔다. 그 행운 속에서 수많은 사유를 할 여유가 생겨 마치 내가 상해에서 1년은 산 기분이었다. 그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을 찾아가 한국에 돌아가 전체적인 얼개를 짜고 시높이 완성되면 내년 4월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이곳
그날 새벽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빗소리를 핑계 삼은 매헌은 잠을 못 이뤘지만 차분하게 새벽부터 하루를 준비했다. 이미 준비가 끝난 매헌을 동방공우로 찾아온 사람은 백범과 이화림이었다. 그들은 어디론가 매헌을 데리고 서둘러 갔다. 그러나 매헌은 여유 있었고, 백범은 조급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인 김산해의 집이었다. 동방공우에서는 3분 거리에 있다. 나는 그의 집을 찾는 데도 애를 먹었다. 동방공우와 실제 거리는 가까웠으나 그 중간에 커다란 남북순환도로가 나있어 미처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사실 백범과 김해산와의 관계는 드
그들은 4월 28일, 홍구공원 답사를 하고 팔선교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인 패륵로 30호인 동방공우로 온다. 공우(公寓)란 지금은 아파트를 뜻하지만 당시는 작은 여관을 가리켰다. 특히 공우는 내국인 전용 여관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시골에서 올라오는 중국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집을 개조한 허술한 숙소로 보면 된다. 당시 공우를 일반 가정집을 여관으로 변경하여 영업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흔적은 매헌의 첫 기착지였던 화합방에 가면 지금도 가정집을 리모델링한 당시 공우 형태의 여관이 남아 있다. 그래서 뒷골목에 있으리라고 보는 데,
내가 잠깐 착각하고 황포강 주변 구 상해성 주변을 쏘다닌 것은 매헌이 아마 폭탄을 실험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나는 매헌이 폭탄을 직접 실험도 하지 않은 채 그 방법만 설명 듣고 거사 현장으로 갔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누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거사를 치르러 가는데 자신이 사용할 무기의 성능도 확인하지 않고 가겠는가?이것은 매헌이 거사 현장에서 무리해서 단상 5m까지 달려간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 시도는 자칫 실패를 불러올 수 있는 무모함이었다. 일본 군대도 15m 이격 거리를 충분히 계산해서 3중 경계를 섰을 것이다. 그가 현
상해에서 머무는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입맛 맞는 식당을 찾는 것이다. 비교적 관광객 상대의 식당은 비쌌고, 아주 싼 음식점은 맛의 기호를 따지기 보다는 단지 한 끼 채운다는 의미 말고는 없다. 매헌과 김구가 처음으로 만난 곳인 사해다관을 찾으면서 배가 고파서 들어간 로컬 맛집에 대한 이야기다.백범은 사실 매우 다급했다. 정작 4·29 거사를 확정하고 거사 당사자를 찾는 데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한인애국단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은 이미 3월 리튼 조사단에 합동 암살단을 보내면서 실패로 돌아가 제일 큰 손실을 보았고, 임
모처럼 조박사님과 대세계 부근에서 팔선교를 찾으며 하루를 보낼 때였다. 팔선교는 아마 황포강으로 흘러가는 지류의 다리 이름이 지명으로 바뀐 장소일 것이다. 지금의 대세계와 인민광장 부근을 말하는 데 정확한 지점은 찾을 수 없다.팔선교는 매헌과 김구가 4월 28일 홍구공원을 사전 답사하고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은 곳이다. 왜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곳이 팔선교다. 그러나 여유로운 매헌과 불안한 김구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는 그날 동행 코스 중의 하나이다. 지금도 가장 번화한 지역이지만 당시는 막 외국인
매헌이 계춘건과 야채장사를 시작한 것은 북영길리를 떠나 실업자 생활을 할 때다. 계춘건은 임정 사무실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골목집인 23호에서 살았다. 아마 계춘건은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어 있어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으로 보인다.그는 도산 안창호의 제자로 흥사단원이자 난징 동명학원 졸업생이기도 한 것으로 보아 도산의 이상촌 건설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매헌의 홍구의거 뒤에 대대적인 한인들 체포령 때 잡혀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독립운동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독립운동가들과는 매우 긴
새벽 기차를 타고 난징으로 향했다. 조박사와 함께다. 하루만에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새벽부터 서둘렀다. 상해에서 난징까지는 급행을 타야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중국의 기차역은 웬만한 공항 정도의 규모이고, 표를 끊거나 교환하기는 공황보다 훨씬 복잡하여 어지간히 정신을 놓다가는 큰일난다. 그래서 항상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기차역에 도착해야 한다. 기차는 또 얼마나 긴지 ‘길어서 기차’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나는 난징 어딘가 산과 물이 낀 넓은 평원이 있는 시골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안창호 선생이 꿈꾸었던 이상촌이 난징에 있었기
기대했던 하선생과의 만남이 별 소득이 없이 끝나자 또 다시 허탈했다.그런데 참 우스운 것이 나도 상해 취재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했는데, 이회영 선생의 상해 거주지가 포석리라는 것을 간과한 채 매헌의 포석리만 찾아댔다. 매헌의 포석리는 아무도 찾지 않았지만, 이회영의 포석리는 정치인인 손자 이종찬이 찾았던 것이다. 아침에 조박사님한테 문자가 왔다. 포석리는 지금의 장락로라는 것이다. 헛웃음이 나올 수 밖에…. 모처럼 개인 날을 보인 상해의 낯을 보기가 왜 그렇게 부끄럽던지….나는 한달음에 장락로로 찾아
이제 포석리는 하련생 선생밖에는 풀 수가 없었다. 그는 매헌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수많은 취재를 했을 것이고,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상해에 관한 한 모든 것이 다른 사람보다는 월등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만남만이 기다려졌다.그런데 아침 일찍 조흔정 박사한테 연락이 왔다. 갑자기 하선생이 상해에 볼 일이 생겨 오후에 온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을 맞춰보는 게 어떠냐고 연락이 왔다. 그 날은 점심 때까지 집에서 인터뷰 준비만 했다. 질문할 사항이 너무 많았지만 시간이 어떨지 몰라 두 개의 안을 만들어 놨다.강의가 돼버린 인터뷰사실
매헌, 그는 토론이 있는 곳, 포석리로 간다. 매헌이 북영길리를 떠나 여러 곳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포석리다. 그를 안아 준 것은 포석리였다. 이회영 선생의 다물단이 있고,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과 그들의 거주지인 태평촌이 3 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이 바로 포석리다.나는 사실 이번 상해 취재 동안 포석리를 찾는 것에 제일 애를 먹였다. 어느 곳에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포석리를 몰랐다. 그러나 포석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매헌이 홍구의거를 하기 전까지 주로 살았던 하비로 1040호도 이 부근으로, 그가 사상적으로 완성한
북영길리를 찾다.매헌이 숙식 해결을 위해 취업한 곳이 바로 모자 공장인 종품사였다. 안중근 의사 동생인 안공근이 소개해준 공장이다. 당시 상해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를 떠나면서 가산을 정리해 오거나 필요한 돈이 있으면 국내에서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특별한 직업이 없거나 가지고 온 돈으로 작은 사업을 하면서 집안을 꾸려 나갔다. 그렇지 못한 경우 매헌처럼 취업을 해야 했다.당시 임정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상해로 들어오는 이주한인들을 취업시키고 의경대를 통해서 보호해 주는 역할이었다. 물론 이들로부터 보호 명목으로
매헌은 아무 연고 없는 상해 화합방에 몸을 풀었는데, 그곳은 임정과는 7분 거리,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의 맞은 편, 그가 나중에 취업한 종품공장과는 5분 거리였다.그의 뜻은 창대했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그는 단순히 상해 거주 2000명 중의 한 사람, 임정이 보호해야 할 거류민 중의 한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영웅도 아니었고, 가열찬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다. 당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에서 도둑놈이 들어왔을 때 떠들어대는 이야기 정도로 빈번했고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했다. 노선에 대한 차이는 냇가에 고기 잡
이제부터 걷기가 시작됐다. 나는 상해에 있는 동안 하루 평균 6시간을 걸었다. 걷는 것만큼 지리를 잘 익히는 것은 없다. 그날도 무작정 걷다가 한 통의 전화 때문에 하던 생각을 놓치고 겉도는 발걸음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련생 선생과의 약속이 잡혔기 때문이다.전날 저녁에 상하이 박 관장님의 주선으로 관련 사람들을 소개 받았다. 상해에 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나의 상해 취재를 한껏 부풀게 해 준 사람들이다. 아마 이들의 친절은 내내 잊지 못할 것이다.상해 외탄 거리의 건축물에 관한 누구 못지않은 지식을 축적하고 있
상해 취재 첫날 저녁. 함께 레지던시를 쓰는 화가 친구가 상해 입성 파티를 열자고 숙소 부근에서는 꽤 큰 식당으로 갔다. 그 친구도 중국말을 못하니 우리는 손짓 발짓 다하며 주로 음식 사진을 보고 식사를 시켰다. 그런데 중국 음식점에서는 사진을 보고 식사를 시키면 가끔 낭패를 본다.며칠 뒤 김구의 거주지에 커다란 레스토랑이 있어 그래도 그 분이 살던 곳에서 잠시 상념이라도 젖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가 커다란 사진이 있는 게밥을 시켰는데, 사실 그 게는 초인종 보다 조금 큰 게여서 한 숟가락 뜨니 바닥이 보여 낭패를 봤다.만만하고 알만
매헌이 그랬듯이 나도 고립무원의 상해로 무작정 떠났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매헌처럼 나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상해로 갔다.막막했다. 누구는 무모하다고 했고, 누구는 용기 있다고 했다.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고,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닌 곳에 덩그러니 놓인다는 것이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아닌 게 아니라 용기가 필요한 대목이었다.사전에 조사는 한다고 했지만, 취재에 어떤 내용이 어떻게 도움이 될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 캄캄한 상태로 노트북 하나와 카메라 한 대 메고 한밤 중에 상해 홍차오공항에 도착했다. 이 때의 절망감이라니
남화연맹의 운영 조직형태를 보면, 전지공작대 아래에 선무반과 초모반을 두고, 초모반 아래에 국외, 국내, 일본군대 초모반을 두어 국내외는 현장 초모를 담당했고, 일군내 초모반은 침투초모를 담당했다.나는 상해 취재 내내 이 일본군내 침투 초모단을 눈여겨 봤다.어쨌든 초모단의 역할은 독립운동에서 매우 컸다. 이렇게 볼 때 이흑룡은 어느 단체의 초모단 하부 조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는 끊임없이 그리고 오랫동안 매헌의 사상과 사람 됨됨이, 그리고 독립운동의 자질과 특성을 파악했으리라 본다.그런데 매헌은 의주를 거쳐 만주 지역을 편력하면서
나는 작년부터 매헌 윤봉길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상해행을 준비했다. 이미 알려질 대로 잘 알려진 윤의사에 대한 글을 무모하게 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꼈기 때문이다.홍구의거가 워낙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묻혔을 수도 있지만, 특히 그가 거사를 치르기 전까지의 의사 결정 과정이 너무 허전했다. 일본인들은 시라카와의 죽음을 전사로 표시하면서 윤의사의 의거를 테러라 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시라카와의 죽음이 전사라면 매헌은 홀로 전쟁을 치른 것이 되는데, 그 방어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