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닥에서 1980년대 초에 작성한 내부 보고서가 있다. 거기엔 필름 카메라의 종말을 비롯한 미래 세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진단이 담겨있다.그런 코닥이 왜 몰락했을까. 그것은 노키아나 타임에게도 공통된 질문이다. 이제 책과 신문도 종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로 가고 있다.어느 순간 책과 신문의 향은 과거 속 얘기로만 남게 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책과 신문향이 좋다. 신문에 글을 쓰면서 감사했던 것 중 하나도 지면(紙面)을 통해 예산군민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2년이 지났다. 한 주
바투(징기스칸의 장손자)가 이끈 몽고의 유럽원정군이 오고타이칸의 죽음으로 회군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서유럽 전체가 폐허가 됐을 것이다.지금까지도 백인에게 황화(黃禍)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킨 사건이다. 실제 몽고군의 전투력은 현대 미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고려는 그런 몽고와 30년 전쟁을 벌였다. 후일 원(元)이 거의 유일하게 고려에게만 체제와 풍속을 보장해준 원동력은 거기에 있다.그런 몽고군에게 타격을 안긴 대표적 인물이 김윤후다. 그가 처인성에서 몽고군 원수(元帥)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
은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다녀온 강항이 쓴 책이다.그는 자신이 본 참상의 첫머리를 이렇게 적고 있다. “적선 6백, 7백 척이 두어 리에 걸쳐 가득 차 있었고, 우리나라 남녀가 왜놈과 더불어 거의 반반씩 되었는데 이 배 저 배에서 부르짖어 우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하였습니다.” 휴전협상이 결렬된 뒤 재개된 정유재란의 참상은 이전과 달랐다.칠천량 해전과 남원전투에서의 패배로 호남도 일본군 수중에 들어간다. 이때 일본군은 인간사냥에 나서는데 그때 포로가 된 수많은 조선인이 서방의 노예상인에게 팔려나갔다. 루벤스(Pe
민주주의의 핵심 실천요소는 다수결이고 그 완결체는 만장일치다.장애인 학교 건립을 위한 지역민 공청회를 연 후 주민투표를 했다. 그 결과 만장일치로 반대의견이 나왔다. 그럼 이것은 민주적이고 정당한가?일본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다. 전후 폐허가 된 유럽은 일본으로부터 각종 물자를 수입한다. 사상 최대의 경제호황과 함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가 전개된다. 25세 이상의 남성에 대한 보통선거권 부여를 비롯한 민주적 기반이 이때 마련된다. 그런 일본이 왜 군국주의로 방향을 바꾼 것일까.1931년 일본 군부는 만주사변을 일으
군 제대 후 꼭 40일 만인 1991년 12월 25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에 반환되기 전의 홍콩을 거쳐 런던 히드로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새벽시간이었다. 환승을 위해 잠시 머문 홍콩의 공항직원 만큼이나 히드로에서 입국 심사하던 영국 친구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그런데 정말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 후에 벌어졌다. 시내로 가야하는데 공항전철이 연휴(박싱데이)라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얇은 지갑을 가진 배낭여행객에게 공항에서부터 살인적 물가를 체감하게 해줬다. 당시 내가 서울시내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데
한국사는 준엄하다. 왕위에 있던 사람을 폐위해 일개 군(君)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燕山君) 폐위에 대해 조선이 명에 설명한 내용은 그가 실제 폐위까지 이르게 된 사안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것은 조선의 체면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당시 명의 기준에서 보면 연산군의 그 어떤 행위도 왕을 폐위시킬 명분 자체가 안됐다. 조선은 왕이 아닌 사대부의 나라임을 반증하는 것이다.나는 연산군을 옹호할 생각이 없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연산군의 행적은 그에 대한 연민의
드라마 를 재밌게 봤다. 흥미로운 내용은 물론 다양한 극중 인물이 주는 매력도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줬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도깨비 역을 맡은 배우 공유는 더욱 특별했다. 이전에 접했던 그의 작품 속 모습과 달리 그의 팬이 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순간 후배 얘기가 떠올랐다. 그가 현역 장교로 있을 때 공유가 그의 부대로 배치돼 왔다고 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공유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후배가 공유에 대해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정말 그런가. 그럼 중이 모두 떠난 절은 어떻게 되는 건가. ‘어차피 떠날 수 없을 테고 설사 떠난다 한들 들어오고 싶어 하는 중은 많으니 절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떠나는 중이 누군가의 문제다. 사실과 해석의 문제는 별개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에 대한 일화 중 잘 알려진 하나는 규칙적인 산책이다. 이웃들은 그가 산책 나오는 것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췄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산책시간을 딱 한 번 어긴 적이 있다.바로 장 자크 루소의 을 읽고 있
옛말에 “떡 하나를 먹어도 누가 준 것인지는 알고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속엔 우리 조상들의 베풂과 감사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혹은 너무도 평범한 어떤 것일지라도 그 주체를 알아야 한다. 때로 거기엔 존경과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토양관련 교육을 할 때면 매번 교육생에게 드리는 말씀이 있다. 토양의 산도를 측정하는 기준인 pH를 읽는 방식이다. 대부분 ‘피에이치’로 발음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조차도. 그런데
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동탁 암살에 실패 후 쫓기 던 조조가 사소한 오해로 인해 은인인 여백사와 그 가족을 모두 죽이고 한 다음 말이다.“내가 세상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섬뜩한 이 장면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조의 강렬한 권력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사소한 오해가 불러온 비극이다. 권력의지라는 측면에서 이 장면은 최후의 승자로 유비가 아닌 조조가 등장하게 되는 사실을 마키아벨리적 시각에서 정당화한다.그런데 범인(凡人)에게 정
단 둘이 얘길 나눴다. 난 술을 마신 상태였고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다.문제는 그와 내가 나눈 얘기가 제3자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에 있었다. 나는 분명 사실을 얘기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거짓을 말하는 술주정뱅이로 몰아갔다. 오래 전 일이지만 다양한 인간군상의 한 면을 체험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사람의 본 모습은 결국 극한상황에서 나온다.이긍익이 쓴 에는 극적인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의 얘기가 나온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묻는다. “강희안이 그 역모를 아느냐.” 성삼문의 대답에 강희안의 운명이 달린 순간이다. 성삼
나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불과 3년 터울인 예비역 선배들은 과가 아닌 법정대 입학생들이었다. 취지는 1년간 대학생활을 하면서 정치외교학과, 법학과, 행정학과 등의 학과 진로는 추후 본인의 선택에 맡기는 제도였다.의문이 들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온 방식보다 훨씬 합리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다. 취지는 사라지고 부작용만 남았기 때문이다. 1년의 대학생활 속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학문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아닌 냉엄한 현실뿐이었다.‘고시라도 보고 취업을 잘하려면 법학과가 제일이지’ 그 결과 학과의
서용보(徐龍輔)를 아는가. 그렇다면 정약용(丁若鏞)은 어떤가. 한국인 누구도 와 다산초당으로부터 완벽히 격리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조선 당대에도 그랬을까. 그것은 완벽히 역전돼 있었다.정약용은 서용보에게 끊임없이 선처를 구했지만 서용보는 정약용과 그 후손을 폐족(廢族)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역사는 당대와 후대의 평가가 얼마나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우리는 지금 공맹(孔孟)을 얘기하지만 맹자(孟子)가 살던 당대 최고 지성으로 평가받은 인물은 순자(荀子)였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그는 현재 기자가 아니다. 기자에서 국회 보좌관, 청와대 행정관 그리고 노무현 재단 사료연구센터 본부장까지 직함이 바뀌었지만 내겐 여전히 김상철 기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경향신문 기자로 있을 때였다. 지금은 사라진 경향신문사 근처 ‘자유인’이라는 맥주 집에서였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즐겨 찾던 그곳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지만 품격과 정겨움이 있는 지식인의 담소 공간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어느 비 내리던 날, 몇몇 뜻 맞는 이들과 번개모임을 할 때도 그는 자리에 함께 했다. 세월이 무심해서일까. 나는 그 번개모임에 함
영화 의 출발점은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이다. 현실이라 믿고 있는 나의 모습과 꿈속의 나비 중 누가 진정한 존재인가. 의문은 계속된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수학적 진리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장자가 살던 그 시기 그리스에는 유클리드가 있었다. 그가 남긴 은 예수가 이 땅에 오기 거의 300년 전 쓰여졌지만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현대인은 고민 중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지만 우리가 가진 고민 대부분은 이미 옛 사람들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고전을 읽는 이유다.
현재 국회보좌관으로 있는 박성휴 전 경향신문 기자는 지금도 문득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은 인물이다. 내가 페이스북에 가입하게 된 것도 그와의 소중한 인연과 권유 때문이었다. 공간과 시간적 격리에 따른 소통의 부재를 그렇게 나마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페이스북에서 어느덧 친구가 2700명을 넘었다. 온라인상의 인연이라는 것이 대부분 허무하고 포말적이라지만 세상사 그렇듯 거기에도 예외가 있다.그런데 아직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는 것이 있다. 페이스북 친구의 기준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친구가 돼야할까. 온몸에 태극기를 두른 채
문답의 기본 전제는 그 대상과 목표에 대한 적확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적확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가 이미 충분한 정도의 앎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어떤 사람이 ‘전쟁을 말하는 자는 먼저 그 자신부터 입대하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여기엔 이런 물음이 뒤따른다. ‘전쟁을 말하는 자는 평화를 부정하는 자인가?’, 물음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과연 평화는 무엇인가?’, 이제 돌아보자.1910년 8월 29일 한반도 전체의 그 평온함은 진정 평화인가? 또 하나, 그런 논리라면 이런 발언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은
어느 날 저녁, 화성이 지구에 가장 근접했을 때 스마트폰에 그 모습을 담았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면 달만 보고 화성을 찾지 못한다. 내 눈엔 보이는 그곳을.인류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다면 그나마 가장 실현가능성이 있는 곳이 화성이다. 1492년의 유럽인들에게 콜럼버스의 항해가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화성을 지구와 같은 환경으로 만드는 테라포밍에는 난관이 너무도 많다. 낮은 기온, 엷은 대기, 약한 중력 그리고 태양풍으로부터 대기와 생명체를 보호해줄 자기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것은 역설적으로 지
오래 전 고시원에서 함께 꿈을 나누던 고교 동창이 산책 중 내게 이렇게 말했다.“시인이 되려면 시들어가는 풀 한 포기를 보며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나는 그 순간 내가 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납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가슴에 담게 됐다. 그것이 시적 감수성인가와는 별개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인 것은 분명하다.물론 그렇다고 내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시는 여전히 넘기 힘든 거대한
군 복무시절 일이다. 근무 중 대대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보안대에서 불시에 내무반 관물함 검사를 했는데 문제가 생겼으니 올라오라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던 담당 장교는 내 관물함에서 찾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리고 대화가 이어졌다.“이 책은 뭔가?”“제가 읽고 있는 책입니다.”“책 내용에 대해 말해보게?”“철학서입니다.”한 동안 말이 없던 장교는 이렇게 상황을 정리했다.“이런 책은 군에서 읽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으니 압수하겠네. 특별한 조치는 취하지 않겠지만 앞으로 이런 종류의 책은 반입하지 말게.”지금 군대에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