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로(怡老)’라는 호는 권돈인의 호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했다. 이 (도1) 글씨가 추사의 글씨라면 ‘이로’는 당연히 추사의 호이어야 한다. 현재 ‘이로’가 추사의 호로 거론된 바는 없다. 추사의 생질서(甥姪壻, 누이의 사위)로 제자인 조면호(趙冕鎬, 1803~1887)가 ‘옥수(玉垂)’란 호를 썼지만 ‘이당(怡堂)’도 썼다. 연결지어 볼 수도 있겠지만 조면호가 노년에 ‘이로’라고 쓴 예는 없다. 조면호는 글씨를 잘 썼다. 특히 자기 나름의 예서를 구사했다. 글씨는 조면호와는 차이가
오직 수당기념관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편액(도1)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이재 권돈인의 글씨가 아니라 추사의 글씨로 보인다고 했다. 추사의 글씨라는 사실이 입증되려면 세심히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 많다.먼저 관지를 본다. 에는 관지로 ‘이노(怡老)’라고 호만 써 있다. 인장이라도 표현되어 있으면 이렇게까지 글 쓸 필요는 없겠다. 권돈인의 호가 ‘이재’이기에 나이 들어 ‘이노’로 쓴 것으로도 보기에 권돈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재’는 한자로 ‘彛齋’다. ‘이’ 자의 한자가 서로 다르다.권돈인은
“보존위원회, 수몰 위기 平遠亭(평원정) 공사 변경을 탄원”1976년 2월 1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방산저수지 공사로 1637년 건립된 수당기념관이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해 위태위태했던 것이다. 현재 수당기념관으로 불리지만 이때만 해도 ‘평원정’으로 불렸다. 평평하면서 멀리 탁 트인 모습이어서 ‘평원정’일 텐데 지금은 저수지로 옛 모습을 많이 잃었을 것이다.수당기념관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 이충구, 이승복, 이장원 4대에 걸친 수당가 지사의 혼이 느껴지는 곳이다. 수당 선생은 한문학사에서
우리 지역에서 추사고택과 화암사 말고 추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신양면 서계양리에 있는 한 정자다. 정자 이름이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술에서 흘러오는 달천천과 청양에서 흘러오는 죽천천이 만나 예당저수지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 있다. 1923년 4월 26일 신양초등학교가 신양공립보통학교로 이 정자에서 개교했다. 신양초의 학교 문집 이름도 《일산이수정》이다. 이 자그마한 정자 하나가 우리 예산교육사에 큰 획을 긋고 있다. 특별난 정자다. 이 정자에 걸려있는 편액(
지난 15일 대입 수능이 치러졌다. 국어에는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과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을 각색한 시나리오 작품이 묶여 나왔다. 지문이 상당히 길 수밖에 없다. 고전 소설로는 작자 미상의 ‘임장군전’이 나왔다. 세 작품 모두 픽션으로 공히 인물과 사건, 심리의 얽힘이 머리칼을 세우게 한다.갈래에 대해 경중을 가리는 것은 부질없지만, 시나리오 작품 대신 논픽션인 수필 작품을 넣어 출제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한다. 수필은 자신이 실제 경험한 것을 진솔하게 쓴 글이다. 수필은 길지 않은 글이기에 문제지 글줄쫒
올해 유홍준 교수의 책 《추사 김정희》가 나왔다. 지난 2002년에 나와, 절판된 《완당평전》을 개고해 출간된 것이다. 《완당평전》이 출간되면서 오류와 위작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러한 점을 반영한 것이 《추사 김정희》이다. 《완당평전》에는 실렸지만, 《추사 김정희》에서는 빠진 작품들이 다수 있다. 그중에 (도1)이 있다. 이 글씨는 위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기 때문에 빠졌을 것이다. 이영재·이용수 부자가 2005년에 쓴 《추사진묵》이라는 책에서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한 글씨 다른 평“이 세
추사 글씨가 사라졌다. 오석산 화암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쯤에서 훌쩍 벗어나야겠는데 또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다. 글에는 시의성도 있기 때문이다.오석산 화암사에 있는 추사의 금석문은 , , 이다. 그리고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가 있다. 현재 이 금석문들은 비바람 속에서도 160여년을 꿋꿋 꼿꼿 버티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사는 유배지 남국, 제주에서 1846년 환갑을 맞았다. 이 해 화암사를 중창하고 추사는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烏石山華嚴寺上樑
화암사와 그 근처에 있는 추사의 금석문은 , , 이다. 여기에 암각 글씨(도1)를 발굴하여 네 번에 걸쳐 추사의 글씨임을 고증을 하였다. 이 바위의 높이는 3m정도다. 암각 글씨는 지면에서 210cm와 256cm 사이에 있다. 글씨의 길이는 46cm이다. 화암사는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경주 김씨 원찰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절 이름을 썼다. 지금도 김한신이 쓴 현판(도2)이 걸려 있다. 증손자 추사는 바위에 을 써서 남겼다.
암각 글씨(도1)가 추사의 글씨임을 증명하는 데에 한재락(韓在洛)을 등장시켰다. 한재락은 큰아버지인 한석희(韓錫禧)의 묘지명 (도2)을 썼다. 또박또박 해서체로. ‘오(嗚)’자와 ‘홍(鴻)’ 자는 점 두 개로.한재락은 개성 사람임에도 추사와 인연이 있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은 추사의 글씨다. 을 임서(臨書, 법첩을 옆에 두고 보면서 따라 쓰는 것)한 것(도3)이다. 은 한나라 때 궁전에 설치한 등잔의 기러기 발 모양의 등잔대에 새긴 글
암각 글씨(도1)의 ‘烏(오)’ 자를 들여다 본다. 글씨는 울퉁불퉁한 바위의 면을 가다듬지 않고 원석에 썼다. ‘石’ 자나 ‘山’ 자보다는 더 자세히 보아야 한다. ‘烏’ 자를 자세히 보면 특이하고 특별난 것이 발견된다. 마지막 부분의 점 네 개를 두 개로 처리했다. 어찌된 일일까? 요즘 공모전이나 휘호대회에서 점 두 개로 썼다면 오자(誤字)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 점 넷은 불 화(火)로, 해서 글씨에서는 네 개의 점을 온전하게 쓰든지 한일자로 처리해 쓴다.해서체의 ‘烏(오)’ 자를 점 두 개로
제주 유배객으로 있을 때 추사는 박혜백을 만났다. 제자가 된 박혜백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추사를 따라 서울까지 왔다. 박혜백은 추사와 한강변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추사의 인장 180방을 찍고 엮어《완당인보》를 만들었다. 이《완당인보》에는 ‘오산독화루(烏山讀畵樓)’라는 인장이 있다. 추사의 당호(堂號)로 볼 수 있겠다.지난 2003년《예산문학》에 실린 월천(月川) 노종두(盧鐘斗, 1935~2013) 선생의 ‘추사고택 기행’이란 글을 보면, 고택이 개인 소유일 때 ‘오산독서루(烏山讀書樓)’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오산’
이번 글은 평소 미스터리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쓴 것이다. 추사가 붓으로 세상을 호령하고 떠난 지 160년이 지났다. 그간 추사의 이 암각 글씨가 세상에 응당 일찌감치 공개가 되었어야 할 테다. 하지만 왜 여태껏 공론의 장으로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공개되어 추사 글씨이냐 아니냐에 대한 필전(筆戰)이나 설전(舌戰)의 치열한 논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그간 알려진 추사 암각 글씨에 대한 논란과 논쟁은 있었다. 과 관련해서는 추사의 글씨인가 육유의 글씨인
바로 앞서 이야기한 최순우 옛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이태준 옛집이 있다.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소설가이다. 세련된 문체와 소설 기법의 완숙미를 보여주었다. 이태준 고가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이태준이 1933년부터 월북하는 1946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시인 정지용이 부러워하고 좋아했다는 이 수연산방은 지금은 찻집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차내음과 더불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묘미가 있는 공간이다.이곳에는 추사 글씨 , 편액이 걸려
서울 성북동(城北洞) 하면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도시화로 인한 현대인의 각박한 삶을 그렸다. 이 성북동은 지금은 오히려 서울에서 가장 예스런 동네로, 지치고 힘든 삶을 추슬러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큰 발자국을 남기고 간 문화예술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번잡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공간이 골목골목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이 중 간송미술관,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최순우 옛집은 한나절을 참 소소하게 보내기에 좋은 공간이다.
추사의 친필이 전해오지 않고 현판이나 탁본으로라도 글씨가 전해온다면 그나마 참 다행이다. 하지만 현판이나 탁본은 추사의 글씨를 감상함에 있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각수(刻手) 등의 의중에 따라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추사 작품의 정확한 텍스트를 선정하는 일이 중요한 일로 떠오른다. 제주 추사관에서 소장·전시되고 있는 탁본 글씨 (도1)이 그러한 작품의 하나다. 이 은 지난 2004년 과천시에서 주최한 ‘추사 글씨 탁본전’에도 나온
이번에는 친필(도1)을 소개한다. 예서 글씨다. 은 그간 탁본으로라도 전해내려 왔지만 은 탁본이나 현판으로도 전하지 않는다.1956년 12월 국립박물관(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완당 김정희 선생 100주기 추념 유작 전람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추사 서거 100주기를 기념해서 열린 것이다. 이 전시에는 , , 대련, 대련, 등 추사의 내로라하는 많은 명작만이 아니라 교유 인물의 작품 등 100작품
의 탁본(도1)과 친필 글씨(도2)를 비교해 보겠다. 언뜻 보면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차이가 있다. 탁본에는 두 개의 인장이 있다. ‘김정희인(金正喜印)’과 ‘완당(阮堂)’이다. 둘 다 양각인이다. 친필을 보면 추사는 관지 ‘노완(老阮)’ 글씨 왼쪽 중간에 백문음각인 ‘완당’ 인장 하나만 찍어 작품을 마무리했다.친필의 ‘완당’과 동일한 인장은 , , 등의 예서 글씨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면 어느 개인이나 기관이 소장하고 있더라도 그 개인이나 그 기관만의 것이 아니다. 잘 보존하고 공공의 장에서 공개할 의무가 있다. 수장고에서 나와 밖으로의 여행은 감상자들에게는 안복을 누릴 기회를 주고, 연구자들에게는 더 섬세한 연구의 기회가 된다. 그러면 그 유물도 존재의 가치가 더해진다. 아직도 개인 소장처나 박물관에서 잠자고 있는 추사의 명작이 많다. 개인이나 박물관,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 작품이 영원히 공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길함이 엄습한다. 관련 기관은 추사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이렇듯 추사의 글씨 (도1)에서 동인 이근수가 문학에 뛰어났음이 읽힌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작품으로, 역시 이근수에게 써준 대련 글씨(도2)의 행간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은 ‘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노라’라는 뜻이다. 자연을 벗 삼은 한가로운 생활을 읊은 명구다.매화를 닮은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이근수의 삶으로 볼 때 함축된 의미가 있다. 여기서 특별히 ‘매화’에 주목
대원군의 편에 섰던 동인 이근수의 이 비참한 죽음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위태위태한 말을 많이 해서 고종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매천야록》에서 이근수에 대해 “철면장신(鐵面長身, 얼굴이 검붉으며 키가 아주 큼)으로 늠름한 풍채가 우인(羽人, 신선)과 검객(劍客) 같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굽히지 않고 위험한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마침내 터무니없는 화를 당했다”라고 쓰고 있다.지난 2009년 10월 1일자 한겨레신문에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글 중 「찢긴 신체 보여주며 “니들도 조심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