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도1)이 추사의 분명한 작품임을 여러 관점에서 들여다보았다. 이 추사의 작품이 아니라면 추사는 현재의 자리에서 처절하게 내려와야 한다. 허상이었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해야 한다. 지금 추사의 자리를 이재 권돈인이나 위작의 주인공으로 대체해야 한다. 물론 권돈인도 글씨를 잘 썼다. 추사의 영향을 받았기에 핍진하게도 썼다. 하지만 추사와 비교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다.앞에서 이영재·이용수 부자의 《추사진묵》(2008년 《추사정혼》이라고 책 이름을 바꾸어 출간)이란 책은 오류가 너무 많다고 이야기했다.
(도1)에서 ‘茗(명)’ 자는 추사를 추사이게 한 결구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茗(명)’ 자의 ‘名(명)’ 자를 더 들여다 보겠다. 백석신군비의 ‘名(명)’ 자(도2)를 비교해 보자. 추사는 첫 번째 획, 이 획과 나란히 하는 두 번째 획은 서로 길항(拮抗, 서로 버티어 대항함) 관계를 유지하며 팽팽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긴장감 넘치는 탄탄한 필획을 보여주고 있다. 백석신군비의 ‘名(명)’ 자와는 좀 다르다. 일반적으로 같은 흐름으로 쓰는 것과는 비교가 되는 ‘名(명)’ 자이다. ‘禪
(도1)의 글씨를 분석해 보겠다. ‘禪(선)’ 자를 보자. ‘示(시)’ 부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가로획은 추사만의 가로획이다. ‘못 모양’(필자가 임의적으로 붙인 이름)을 하고 있다. 추사의 가로획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이러한 ‘못 모양’의 가로획은 추사의 글씨에서 많이 나타나고 변화를 거듭해간다. (도2),(도3),(도4) 등에서 볼 수 있다. 이외의 글씨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은 이러한 가로획이 시작되는 글씨로 볼 수 있
(도1)의 관지에서 ‘白石神君碑意(백석신군비의)’에 대해 살펴 본다. 백석신군비의 뜻을 살려 썼다는 것이다.지난 2007년 《차의 세계》 9월호에서는 을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에서 집자해(도2) 추사의 글씨라고 했다. 중국 허베이성 천불동 한비당(漢碑堂)에서 찾아냈다며 이 진품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신문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추사의 서학(書學)이를 강우방 선생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이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그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필자는 그 둘을 비교해봤다. 비석 글씨는 파임이 분
이 (도1)이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은 이영재·이용수 부자가 2005년 출간한 《추사진묵》에서도 보인다. 지난번에 보았듯이 을 위작이라고 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을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의 글씨라고 한다. 에 대해 《추사진묵》에 실린 글의 전문(全文)을 그대로 싣는다.“간송미술관 소장 명선 작품 역시 이재 권돈인의 작품이다.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했듯 ‘염髥’, ‘우염又髥’, ‘우염거사又髥居士’, ‘居士거사’, ‘병거사病居士’, ‘염나髥那’, ‘나가那伽’
이 글은 「추사의 진위에 대한 고증, 은 예술문화사의 보배로운 명작이다」란 제목으로 《월간 서예문인화》 잡지 12월호에 실린 글이다. 몇 번에 나누어 싣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시작한다.(도1)이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은 앞에서 살펴본 과 궤를 같이 한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이 수년 전부터 아니라고 주장해 왔는데, 최근에 조우석 언론인이 가세해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이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은 지난번에 본 과 겹쳐지는데, 겹쳐지는 부분은 생략
이 글씨(도1)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살펴본다. 지난 2017년 8월 7일 「한바탕 ‘침계(梣溪)’ 속으로」라는 글에서 윤정현의 호인 ‘침계’를 쓴 글씨를 여러 작품 소개한 바 있다. 이중 흥선대원군 석파(石破)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쓴 (도2)도 소개한 바 있다. 관지의 직곡산방(直谷山房)이라는 당호로 볼 때 1874년 정치에서 물러나 양주에서 머물 때 쓴 것이다. 윤정현이 생을 마감하는 해에 써 준 것이다. 이하응은 예서체로 썼다. 이 글씨의 ‘계(谿)’
먼저 (도1)의 의미와 소장자의 이동을 살펴보겠다. 을 그대로 풀어보면 ‘계산은 끝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계산(谿山)’은 시내와 산 즉 자연의 대유적 표현이다. 계산은 고전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강산(江山), 강호(江湖), 산수(山水), 산림(山林), 임천(林泉), 풍월(風月) 등과 함께 자연이란 대유적 의미로 쓸 수 있는 말이다. 은 ‘강산무진(江山無盡)’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그림을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라고 할 수 있는데 ‘계산무진도(谿山無盡圖)’와 다르지 않다. ‘계
이 글은 「추사의 에 대한 진위 고증, 은 추사의 명작이다」란 제목으로 《월간 서예문인화》 잡지 11월호에 실린 글이다. 몇 번에 나누어 싣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도1)과 (도2)은 ‘진위 논란’이 있다는 이유로 작년 보물 지정에서 탈락했다. 그 여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보면 명확한 근거를 제시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공박을 당하는 쪽에서도 추사의 작품이라는 명확한 근거를 내놓지 않고 있다. 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앞에서 글씨(도1)를 분석하면서 ‘氷(빙)’ 자가 아니라 ‘外(외)’ 자임을 살폈다. 글씨를 더 분석해 보겠다. ‘外(외)’ 자의 왼쪽 ‘夕(석)’ 자는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상하로 간격을 넓게 벌려 썼다. ‘夕(석)’ 자를 이렇게 벌려 쓴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과 오른쪽의 ‘卜(복)’ 부분의 처리는 ‘氷(빙)’ 자로 읽게 된 이유이다. 그러면 추사는 왜 이렇게 쓴 것일까? 글씨 분석 예서체의 자형은 일반적으로 세로보다는 가로가 긴 형태이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도 있
추사의 글씨에 대해 ‘괴(怪)’를 많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추사는 서법(書法)에 충실한 글씨를 썼다. 함부로 ‘괴(怪)’하게 쓰지 않았다. 추사의 글씨를 거슬러 올라가면 꼭 근원이 있다. 추사는 제목이 긴 시
이 글은 이번 달 《월간 서예문인화》 잡지 10월호에 실린 「성락원의 암각 글씨 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의 글을 좀 흔들어 몇 번에 나누어 싣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시작한다.최근에 추사 글씨로 시끄럽다. 중국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서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전』이라는 주제로 열린 전시에 나들이를 한 과 이 그렇고, 서울 성북동에 있는 정원 ‘성락원(城樂園)’의 바위에 새겨 있는 추사 글씨가 그렇다. 과 은 모두 그간 추사의 명작으로 알고 있는데 추사의 글
추사 에 찍혀 있는 ‘민씨원선관심정금석서화(閔氏員船館審定金石書畵)’ 인장(도1)의 주인은 그간 널리 알려진 민영익이 아니라 민영식(閔英植)이다. 아무리 봐도 둘은 동일 인물이 아니다. ‘민씨원선관심정금석서화’ 인장과 이 의 소실(燒失) 사실에 대해 들여다보며 에 대한 글을 갈무리한다.‘민씨원선관심정금석서화’는 참 잘 새긴 인장이다. 예술성이 뛰어난 전각(篆刻) 작품이다. 뛰어난 포치, 문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 깔끔한 획과 인변(印邊) 처리, 도법(刀法)으로 볼 때 글씨와
지금까지 추사 (도1)의 ‘대방(帶方)’은 남원이 아니고 나주임을 고증하였다. 탄생 시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 의 왼쪽 아래에 ‘민씨원선관심정금석서화(閔氏員船館審定金石書畵)’라는 장방형의 인장이 찍혀 있다. 이 인장은 한때 소장했거나 감상했던 사람이 찍은 것이다. 추사의 유명한 난초 그림 에는 소장인(所藏印)과 감상인(鑑賞印)이 그림과 화제 글씨에 손상을 주었다. (노재준, 「추사 ‘불이선란도의 원형과 참모습 고찰」, 《문헌과해석》, 2015년).의 이
지난 2015년 전북 고창에서 추사 글씨 주련(柱聯) 11점(도1)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주련은 추사가 제주 유배길에 남겼다는 것이다. 안도환이 에서 고창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정읍을 거쳐 장성, 나주로 가면서 고창을 지나갔을 가능성은 크다. 추사 주련 11점은 그 근거로 인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앞에서 언급한 유배 경로에서는 역사적으로 큼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제주로 유배를 당했던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의 거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한양으로 압송되
조선후기에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깊게 들여다 본 사람이 있다. 추사보다 좀 앞선 시기의 실학자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다. 안정복은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기까지 다룬 역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언급하면서 ‘대방(帶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동사강목》의 ‘지리고(地理考)’의 ‘남대방주고(南帶方州考)’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부분이다.안정복과 정약용“남대방(南帶方)은 당(唐)의 이적(李勣)이 설치한 것인데, 지금 나주(羅州) 회진현(會津縣)이 바로 그곳
추사 (도1)에서의 ‘대방(帶方)’을 최완수 선생, 유홍준 교수보다 앞서 ‘남원’으로 언급하고 있는 글이 찾아진다. 1978년 허영환 선생이 쓴 《추사 김정희 일대기, 영원한 묵향》이란 책에서다. 그 부분이다. “전라도 삼례(三禮)와 완주(完州)를 지나 남원(南原)에서 하루를 쉴 때는 라는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늙은 고양이 한 마리를 그린 것인데 그것은 바다 건너 제주도로 쫓겨 가는 자기의 처량한 모습을 빗대어 그린 것이다. 참으로 형사(形似, 형체가 서로 비슷함)를 초월한 심
시대적 차이가 있는 그림 세 작품을 본다. 단원 김홍도(1745~?)의 (도1), 일호 남계우(1811~1890)의 (도2), 운보 김기창(1913~2001)의 (도3). 세 그림 모두 고양이와 나비가 등장한다. 이렇게 고양이와 나비가 등장하는 그림을 공통적으로 라 부른다.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70세 노인을 의미하는 ‘모(耄)’는 고양이 ‘묘(猫)’와 중국어 발음이 ‘마오[mao]’로 같고, 80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단순한 농업 백과전서를 넘어 조선 최고의 실용대백과사전,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로 평가받는다. 《임원경제지》는 서유구가 30여년 동안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농학·천문학·공학·요리학·의학·어업·예술·상업 등 총 16개 분야로 분류하여 쓴 백과사전이다. 모두 113권 54책으로 구성돼 있다. 거질이기에 지금까지도 완역이 안 된 상태다.서유구의 조부는 서명응(徐命鷹)이고 아버지는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이다. 가정 살림에 관한 백과사전
바로 앞에서 우리 지역 수당기념관의 고택에 걸려있는 를 보았다. 이재 권돈인의 글씨로 보고 있는 가 추사의 글씨라는 것을 다양한 각도에서 입증해 보았다. 세 번에 걸친 에 대한 글을 이렇게 갈무리했다.“ 글씨는 추사가 북청에 있을 때 태어났다. 함경도 북청에서 멀고 먼 추사의 고향 충청도 예산 땅까지는 물어물어 어떻게든 찾아왔다. 차마 추사가 묻힌 곳까지는 가지 못했다. 대신 가까운 곳 수당기념관에 안식처를 정했다.” 갈무리한 글과 관련하여 화암사의 (도1)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