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Adios)’스페인말로 만났을 때, 그리고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 어머나! 저런! 맙소사! 와 같이 다양한 감탄사로도 쓰임.2018년 1월 1일 ‘개봉박두’를 시작으로 총 90편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많은 이들과, 수많은 ‘아디오스’를 외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웃음과 감동, 그리고 감사를 안겨주며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남겨주었다.시작의 이유는 흔적이었다. 내가 함께한 이들과의 흔적들을 남기고 싶었다. 놀이 방법이나 과정들. 그리고 그 속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나
놀이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무목적성’이다.놀이 참여자 스스로가 자발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행하는 놀이를 통해 재미를 얻어내는 것. 특별한 의도를 가진 어른이 각별한 놀이의 방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놀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놀이의 모습일 것이다.하지만 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놀이판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서 놀이의 주도권을 내 손에 틀어쥐고 적절한 수준에서, 적절한 시기까지 놀이의 칼자루를 쥐고 흔든다. 그것이 나만의 게임의 법칙이다.이는 이겨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승리의 단맛을
2000년대를 대표하는 국민게임의 영광을 ‘디비디비딥’에 주었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었지만 ‘디비디비딥’은 그만큼의 재미적 가치가 충분했다. 왜? 지금의 아이들과 지금 당장 해봐도 재밌거덩.아이들이 모인 곳. 그곳이 어디라도 ‘디비디비딥’을 설파하면 그곳은 외계어가 난무하는 놀이판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내게 불현듯 떠오른 또 하나의 단상.때는 1989년의 어느 가을날. 선운산 자락에 위치한 민박집. 그곳은 대학 1년생인 내가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한 MT장(MT:Membership Training의 약자). 내게
‘참참참’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추억의 게임이었다면 2000년대를 대표하는 국민게임의 영광은 ‘디비디비딥’에 주고 싶다.2005년에 시작된 ‘해피선데이’라는 예능프로. 이는 원조 걸크러쉬라고 할 수 있는 ‘여걸식스’의 활약으로 인기를 끌었던 국민예능이었다. 그들이 함께 했던 ‘디비디비딥’과 ‘쥐를 잡자’ 등은 그 당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국민게임이었다.‘우주선에서~ 외계인이 내려와~ 하.는.말!’ 말이 끝나자 마자 등장하는 타이거 마스크. 타이거 마스크를 상대로 ‘디비디비딥’을 시전하며 버티기에 들어가는 ‘여걸식스’.
1996년도부터 방송되었던 ‘이홍렬쇼’는 당시 인기 개그맨 출신이던 이홍렬이 단독 진행했던 토크쇼 형식의 인기프로그램이었다. 특히 게스트와 함께 요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재미를 더하는 형식은 요즘의 먹방이나 쿡방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에 막간 형식으로 진행됐던 게임인 ‘참참참’이 대인기를 끌기도 했는데 ‘참참참’은 뿅망치로 ‘참참참’을 외치면서 상대방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벌칙을 받는 게임이었다.‘참참참’은 20년도 훨씬 지난 추억의 게임으로 지금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82년생 김지영’과 나는 동갑이다. 더 정확하게는 띠동갑.나와 또 다른 띠 동갑인 58년생 분들의 놀이문화 가운데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생맥주, 고고장, 디스코, 통기타, 그리고 모닥불과 캠프파이어 등이 있다. 나의 20대는 그런 문화의 끝자락에 살짝 걸쳐 있었고, 그때 그 시절에 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빈궁한 주머니 사정. 그에 반해 넘치는 체력과 시간. 이러한 사정들이 합의를 이뤄 만들어 낸 기차여행. 기차는 더디고 더딘 무궁화호 열차. 열차표는 그 어디에도 좌석번호가 부여되지 않은 자유이용권.모든 객석은 선착순 우선주
매주 새로운 놀이들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가 직접 놀아보고 재밌었던 특별한 놀이들을 담아내고자 했던 처음의 기획의도는 어느 순간 소재 고갈로 이어졌고 매번 원고마감시한을 넘기며 머리를 쥐어짜게 되었다.그러나 그것은 ‘삶이 놀이다’라는 명분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덧대며 회를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할말과 못할말을 구분해내고 보기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는 일은 다시금 내 머리를 쥐어뜯게 만들었다.나는 나의 이야기들을 남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이야기들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달맞이 도서관을 처음 시작하며 아이들과 하고 싶었던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도서관의 사용목적에 따라 적절히 행동하는 법. 즉 조용히 하는 법을 알려 주는 것. 또 하나는 도서관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적절하게 행동하는 선. 즉 적당히 떠드는 적정선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 제공처는 용인의 느티나무도서관이다.어느 해인가 최강유랑단의 나들이 길에 우연히 들르게 된 느티나무도서관에서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최초 2007년 11월에 개장한 이곳은 현 도서관장이자 이사장인 박영숙이라는 인물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곳이
달맞이 도서관을 처음 시작하며 어른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그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런 어른들을 따라 달밤에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도서관이라고 해서 무조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잠을 자든, 숙제를 하든, 만화책을 읽든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생각에는 어른과 아이, 모두가 동의했다.그러나 한시도 가만히 있기가 힘든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 것만큼 조용히 있는 것을 힘들어 했다. 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수시로 돌아다니거나 떠드는 아이
마을의 아이들과, 마을의 학교에서 놀거리를 위해 ‘와글와글 놀이터’를 함께 했다면 책읽기를 위해서 ‘달맞이 도서관’과 함께했다.매주 수요일 오후 마을학교에서 마을의 어른과 아이가 ‘와글와글 놀이터’를 함께 하듯이 ‘달맞이 도서관’은 ‘그 밥에 그 나물’들이 매주 월요일 저녁 마을학교 도서관에서 함께했다.그 시간 동안은 잠을 자든, 숙제를 하든, 만화책을 읽든, 멍을 때리든 간에 그저 그곳에서 머무는 습관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와글와글 놀이터’에서 크게 웃고, 크게 말하고, 크게 뛰었다면 ‘달맞이 도서관’에서는 작게 웃고
‘내 자식이 제일 어렵다.’부모라는 어른들이 공감할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내가 제일 어렵게 만드는 어른은 바로 내 부모라는 이야기로 귀결된다.내가 그랬다. 내 자식을 위해 마을의 아이들과 놀아 보겠다던 나는 정작 내 아이에게는 그리하지 못했다.‘아빠 놀이가 제일 재미없어.’라는 녀석의 외마디는 ‘아빠가 제일 싫어.’라는 말처럼 내 가슴을 후볐다. 그러나 그 말은 내게 건네준 녀석의 ‘세가지 선물’이 되었다.아이를 바라보는 시각내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입장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내 이웃의 아이에게 관대한 어
2015년도 봄. 드디어 신양마을에 와글와글 놀이터가 시작되었다.그것은 새로운 시작점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는 변곡점이 되었다.와글와글 놀이터는 신양마을 최초의 남정네 학부모회장이 마을 학부모들과 함께한 최초의 사업이었다. 그간의 학부모회는 상당기간 거주한 마을 어머니들 간의 유대관계와 나름의 위계질서 하에 이어져온 마을공동체였다. 그 중간에 후임자를 찾지 못하던 학부모회장님의 등 떠밀림으로 시작된 나는 함께할 사람과 조직이 부족한 상태였다.그때 알았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둘이서는 너무 고되고 최소한 셋
한 아이가, 한 마을에서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는 시간은?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거기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까지를 더하면 10년을 훌쩍 넘는다.최강유랑단이 신양마을에 처음 왔을 당시 큰아이는 7살, 작은아이는 5살이었다. 식당도 한자리에서 10년을 버텨내면 맛집이 된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10여년의 시간동안 마을 학교에서 마을과 함께할 무엇이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놀이와 독서, 그리고 목공기술이었다.그중에 놀이와 관련해 시작한 일이 ‘와글와글 놀이터’였다. ‘와글와글 놀이터’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핀란드 편. 그 중에 마이클 무어 감독의 질문과 핀란드 교사의 대답.“좋은 학교는 어떤 곳이죠?”“자기 마을에 있는 학교가 최고의 학교죠”2015년 봄. 마을 속에 놀이터 같은 학교를 소원했다. 마을이 놀이터가 되고, 마을살이가 놀이가 되는 마을. 그런 마을에 있는 그런 학교를 만들어 보겠다고 만들었던 ‘와글와글 놀이터’.그때 그 시절, 와글와글 놀이터 첫날의 전날에 썼던 글이다. 프롤로그 : 6+3지금부터 6년 후 사진 속에 한 아이는
영화는 놀이의 레시피다.나의 유년시절 흉내내기 놀이의 대부분은 책보다는 영화를 통해서였다.의 이소룡을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강렬한 눈빛과 현란한 발차기를 배웠고, 신성일의 을 통해 사나이의 의리와 애절한 사랑을 경험했다.이 모든 경험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두는 나의 아버지 덕이었다.가난한 벽돌공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돈이 드는 일은 대부분 마다하셨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것에는 과소비를 마다치 않으셨다. 취학 전 아동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함께한 영화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 거
‘뒷동산 프로젝트’의 처음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의 유년시절 기억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나의 직접적인 경험이 이유는 아니었다.그때 그 시절,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한 집안의 장남 캐릭터였다.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고 하라는 것은 곧잘 하는 아이였다. 물론 가지 말라는 곳도 가지 않는 아이였다.어릴 적 동네 아이들이 옆 동네까지 찾아가 놀던 곳이 있었다. ‘해골산’이라고 불리던 그곳은 바위와 숲이 어우러진 적당한 크기의 뒷동산이었다. 수풀을 헤치다 지척에서 바라본 뱀꼬리. 바위와 바위가 맞닿아 이루어진 비좁은 바
2018년 여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충남지역본부와 세상놀이연구소와 함께 했던 ‘어린이가 만드는 같이놀자, 놀이지도’ 프로젝트.해당 프로젝트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어디는 놀이터’ 사업의 일환으로 학교 안 유휴공간과 지역공원 등에 아동 참여 놀이터를 만들어 보급해 오고 있는 사업이다. 그 일환으로 충남지역의 놀이터 지도를 만드는데 필자가 그것을 함께 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그 당시 필자는 요청에 대한 대답 대신 한 가지 경험담과 몇 가지 제안을 더하며 이야기가 길어졌다.한 가지 경험담은 ‘뒷동산 프로젝트’였다. 언제든 오고가기 쉬
여름날의 한밤에 한편의 영화를 보았다.영화 ‘락앤롤 보트’(리처드 커티스, 2009). 일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때는 1966년 영국. 당시 정부는 대중음악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클래식에 비해 수준이 낮다는 이유 등으로 각종 규제를 가한다. 이에 영국의 국영 방송국인 BBC 라디오에서는 하루 45분만 대중음악을 틀어주었다.딸랑 45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6년은 영국 로큰롤의 최고 전성기였다. 일터와 공원, 학교와 침실에서 당시 영국 국민의 절반인 2500만명은 로큰롤의 선율에 몸을 내맡기고 열광한다. 어떻게 그럴 수
소통(疏通)과 통합(統合)이 하나된 소통합. 서로가 생각하는 바가 통하고, 서로의 생각들과 행위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 나는 그런 모습을 보았다.매월 놀찾사(놀이를 찾아가는 사람들)와 함께하는 팝업놀이터 개구쟁이 2019년 6월판. 특별할 것 없는 불친절한 놀이터를 지향하던 그곳에 특별한 일들이 벌어졌다.그날의 놀이판에는 예산군 최초(어쩌면 충남 최초)로 페땅크 대회가 펼쳐졌다. 사전 접수를 통해 모인 16개의 참가팀은 3인 1개조로 가족이나 동료, 이웃 등의 다양한 형태로 팀을 구성했다.당초 광시 황새공원에서 펼치기로 했던 놀이판
놀이는 삶의 리허설이다.세상을 알아가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가장 안전하고 적절한 방법은 놀이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경쟁하고 그 경쟁 속에서 좌절과 희열을 맛보며 자기 스스로를 키워 나간다.나와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삶의 물꼬를 바꿔보고자 했던 필자가 선택한 방법도 역시 놀이였고 이제는 그것이 나의 업이 되었다. 하지만 ‘놀이’는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알려고 들면 들수록 넓고 깊은 바다와 같았다. 내겐 놀이하는 어른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즈음 한 지인의 권유로